남편은 하늘을 좋아했고, 아내는 땅을 그리워했다. 조선시대의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아니다. 각자 느끼는 아름다움은 달랐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집에서 이를 절충한 어느 부부의 이야기다.
자녀들이 모두 출가한 60대 부부는 255m²넓이의 집을 고치기로했다. 주인이 떠나고 남은 방과 공용 공간을 각자 좋아하는 스타일과 취향을 담아 변화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는 아내의 오랜 바람이기도 했다. 부부는 서로 추구하는 바가 달랐다. 남편은 51층의 스카이뷰를 좋아했고, 날씨가 좋을 때면 또렷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의 능선을 고층에서 즐겼다. 반면 아내는 땅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식 물을 가꾸고, 땅의 기운을 느끼면서 말이다. 집을 이사할 수는 없기에 고층 아파트는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Studio HJRK의 김혜진 디자이너는 아내를 위해 땅의 안정적인 느낌을 집안 곳곳에 심기로 했다. 서로 다르지만 조금씩 절충하고 양보해서 리모델링한 집은 그렇게 완성됐다. 이집을 사진으로만 본다면 창문을 통해 보이는 풍경을 보지 않는 한 층이 아주 높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을 것이다. 비밀은 컬러에 있다. 테라코타 색,짙은 포도색, 월넛나무의 색 등 어스 Earth, 즉 땅의 색감을 집안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거실부터 주방 가구, 방문과 커튼 등의 패브릭 컬러도 중성적인 뉴트럴 컬러를 적용해 집이 따뜻하고 포근하다.
김혜진 디자이너는 “땅을 그리워하는 아내의 마음을 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최대한 흙과 비슷한 컬러를 집 안에 적용하고자 했죠. 처음 집을 디자인할 때의 컨셉트도 ‘From the Earth’였거든요. 컬러 외에도 안방과 서재 사이의 데드 스페이스를 확장해서 식물도 두고 앉아서 책을 읽거나 아내분이 조용히 기도를 할 수 있는 작은 테라스를 만들었고요, 욕실 샤워부스 위에도 조명을 설치해 마치 해가 잘 들어오는 리조트의 욕실 같아요”라며 세심하게 신경 쓴 디자인 요소를 설명했다. 자녀들이 사용하던 방은 아내와 남편이 각자의 취미 방으로 사용할 수 있게 꾸몄다. 음악을 좋아하는 남편은 방에 CD와 LP를 보관할 수 있는 가구를 두었고, 나무 간살 문을 열면 작은 테라스로 이어져 아내와 함께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간결한 디자인의 책상은 이재하 작가가 윤라희 작가와 협업해 원목과 아크릴 소재로 만든 것. 묵직한 서재의 분위기에 산뜻한 포인트 가구다.
남편의 공간이 음악이라면 아내의 공간은 티룸이다. 세로로 긴 여닫이 문을 열면 차 도구를 예쁘게 보관할 수 있도록 버건디 컬러의 벽에 선반을 짜넣은 작은 수납 공간이 나오고, 게스트룸과 맞닿아있는 나무 격자 문도 열거나 닫을 수 있다. 긴 나무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게스트룸의 옷장이 정면으로 보이는데, 김혜진 디자이너는 옷장 표면에 브랜드 아난보의 파노라마 벽지를 발라 창문 너머의 풍경처럼 연출했다. 그녀는 “이음새가 있는 옷장에 벽지를 붙이는 작업도 까다롭지만 특히 파노라마 벽지는 붙인 다음 하나의 그림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더 어렵고세심한 작업이죠. 그래서 옷장의 틈새도 최소화했어요. 격자문을 열고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흑백의 산수화를 보는 것처럼 몽환적이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느낄수있어요. 여기에 따뜻한 차한잔을 곁들이면 고층 아파트에서도 단독 주택의 기분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죠”라며 아내의 마음을 대변했다. 실제 풍경은 아니지만 옷장에 그려진 자연 풍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근사한 찻자리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최근에는 옷장을 월 커버링으로마감하는 사례가 종종 있는데, 김혜진 디자이너는 별다른 가구 없이 단순하게 연출한 침실에서도 에르메스 벽지를 옷장에 붙여 공간의 심심함도 덜고, 가구가 아닌 벽처럼 보이는 효과도 냈다. 이와 같은 디자인 요소 외에도 이 집에서는 가구를 둘러보는 재미도 발견할 수 있다. 요즘 SNS를 통해 볼 수 있는 가구나 소품은 많지 않다. 몇 개월씩 기다려 배송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최근 유행하는 가구나 조명은 지양했다. 주방 벽의 타일도 디자인적으로 가장 근접한 제품을 찾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직접 주문했고, 복도 벽에 걸린 허윤영 작가의 조명이나 윤라희 작가, 제레미 맥스웰 등 국내 외 작가들의 작품도 적극 활용했다. 뿐만 아니라 가지고 있던 파파 베어 체어를 비롯해 크리스토프 델쿠르트, B&B 이탈리아 등 모던하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의 가구로 집 안을 채웠다. 함께 또 따로 하는 삶에 대한 노하우가 반영된 이집은 많은 부부에게 이상적인 가이드가 될 것이다. 100세 시대에 60대는 더 이상 노년기가 아닌 중년기라고 한다. 부부는 다시 신혼처럼 둘만의 집을 갖게 된 시점에 적극적으로 집을 다시 매만졌다. 어떤 디자인 가구보다도 남은 삶에 대한 설렘과 열정이 이 집의 진정한 키워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