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로 아트 작품을 걸 수 있는 ‘흰 벽’이 많은 집을 럭셔리 하우스라고 하는데 그녀의 집이 그랬다. 입주한 지 1년이 넘었지만 남겨둔 공간이 많았다. 대신 맞춤한 듯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공예 작품부터 조각, 회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최고라 할 만했다.
장 미셸 오토니엘의 이 목걸이가 들어오는 날, 그녀는 살짝 뭉클한 감정이 되었다고 했다. 열심히 살아서 원하는 작품을 집에 들여놓을 수도 있구나 싶어서.
오후 2시. 이정희 씨의 집에는 두터운 햇빛이 긴 광선을 드리우며 거실 안쪽까지 깊게 들어왔다. 섀시 문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순식간에 거실을 가득 메운다. 빛과 바람이 두고두고 좋은 집을 만든다.
허명욱 작가의 블루 옻칠화가 걸려 있는 거실 전경. 삼베의 일종인 천에 옻칠을 반복해서 올려 철판처럼 두꺼워진 작품은 물성과 소재, 기법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형형한 깊이를 보여준다.
“가장 심사숙고해서 고른 작품이 다이닝 테이블이에요. 힘 있는 작품을 원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더라고요. 그러다 조은숙 아트 앤 라이프스타일 갤러리의 조은숙 대표님이 댁으로 가져가시려던 작 품을 알게 됐어요. 금속공예가 박성철 작가님이 만든 건데 표면 전체에 일 일이 홈을 파고 검은색 옻칠로 마감해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멋이 넘쳐요 . 상판 아래쪽을 봤더니 보이지 않는 곳인데도 윗부분하고 똑같이 일일이 무 늬를 새겨 넣으셨더라고요. 남편하고 와인을 마시면서 표면의 굴곡을 쓰다 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이런 것이 공예의 힘이구나 싶기도 해요.” 이 작품은 금속공예가 박성철 작가가 작정하고 만든 대작. 무쇠 다리에 가로 길이만 3m20cm가 넘는다. 느티나무 원목을 상판으로 얹었는데 조은숙 대 표는 “4도어 냉장고만큼 무거워” 하고 말한다. 보기만 해도 그 단단함이 전 해진다. 공간을 잡아주는 힘도 대단하다. 좋은 것을 하나씩 제대로 들여놓는 태도는 집을 꾸밀 때 가장 유념해야 할 항목이 아닐까 싶다. 별로인 것이 하나둘 늘어날수록 공간은 빛과 색채를 잃기 때문이다. 이 집에 있는 가구와 액자, 테이블웨어는 패션 의류 사업을 하는 이정희 씨가 모두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낙점한 것들이다. ‘딱’인 제품이 나 작품이 없는 것은 서둘러 메꾸지 않고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가급적 특 별한 것으로 집을 채우자, 하는 기준을 세우고 나니 빅 브랜드와 기성품은 자연스럽게 밀려났고 그 자리에 아티스트의 작품이 들어왔다.
소반을 쌓아 완성한 침실 옆 사이드 테이블. 도자기에 순은을 입힌 이혜미 작가의 항아리가 눈에 띈다.
다이닝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조광훈 작가의 ‘하트를 품은 오리’를 놓았다. 귀여운 얼굴이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고.
다양한 목가구로 포인트를 준 거실. 손의 노동으로 완성한 옻칠화와도 잘 어우러진다.
이 과정에서 길라잡이 역할을 한 이가 이길연 대표(@kilyeon76)다. 국내외주요 아트페어에 모두 발도장을 찍는 아트 컬렉터이자 열혈 아트 애호가인 그녀는 인맥과 정보를 총동원해 이정희 대표를 아트 신 Scene으로 불러냈다. “정희 씨가 일만 열심히 하는 타입이에요. 집과 직장만 오가다 처음으로 이렇게 좋은 집을 샀으니 이곳에 어울리는 것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싶더라고요. 용인에 있는 허명욱 작가님의 작업실부터 가나아트갤러리, 국제갤러리까지 20곳 가까이 다닌 것 같아요.” 이길연 대표의 강점은 그 집에 어울리는 아트 작품은 물론 포크 하나, 화병 하나까지 최적의 것으로 제안한다는 것. 그런 공력과 마음 씀씀이가 이 집에서 빛을 발했다. 설계 디자인을 함께한 권용석 팀장도 아트, 공예 애호가여서 유독 제안이 풍성했고, 그렇게 류연희 작가와 김정옥 작가의 테이블웨어, 허명욱 작가의 옻칠화와 상부장, 김홍석 작가의 조각, 조광훈 작가의 오리 연작, 박원민 작가의 사이드 테이블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저 돈을 주고 쉽게 구매한 작품에는 이야기가 담기지 않지만 생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지는 작품을 신중히 구매하다 보면 각별한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제 침실에 장 미셸 오토니엘의 목걸이 작품이 있잖아요. 인테리어를 할 때도 이길연 대표님께 모노톤을 강조했을만큼 화사한 컬러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작품은 예외였어요. 영롱한 아름다움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요. 그렇게 작품이 설치되는 날 일밖에 몰랐던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스치면서 찔끔 눈물이 났어요. 그래도 열심히, 잘 살아왔구나, 그래서 이렇게 나에게 선물도 줄 수 있게 됐구나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볼수록 조형미가 돋보이는 다이닝 테이블. 디테일이 살이 있는 블랙 드레스의 뒤쪽을 보는 듯하다.
무표정한 얼굴이라 더욱 매력적인 주방 풍경. 간결함의 미학이 가장 두드러지는 공간이다.
주방 수납장을 채운 테이블웨어 역시 대부분 공예 작가의 작품이다. 보고, 사용하고, 씻을 때마다 손맛의 온기와 매력이 전해져 예전보다 더 즐겁게 요리를 하게 됐다.
이길연 대표는 작품 ‘구슬’의 보라색만 보면 이정희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며 웃었다. “포스가 대단했 어요. 보라색 원피스에 민트 컬러 재킷을 입고 있다 재킷을 벗었는데 등이 이만큼(손으로 큰 동작을 그리며) 파여 있더라고요. 만난 곳이 정 육점 식당이었으니 얼마나 눈에 띄었겠어요. 쉽게 만족할 만한 여인 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이 팍 왔지요.” 가구와 아트 작품이 빛을 발하는 건 인테리어 자체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벽의 마감. 의류 원단이 사업의 핵 심인 의뢰인의 직업을 감안해 삼베에 흰색을 올려 직물의 감촉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했다. 앞뜰과 맞닿아 있는 거실 천장에는 간접조명을 매립해 밤에도 정원의 소나무가 창문에 은은하게 비치도록 했고, 채광을 중심으로 방의 모든 위치와 구조를 완전히 바꾸었다. “쿠션이나 그릇처럼 작은 물건 은 바로바로 바꿀 수 있잖아요. 하지만 장을 짜고 슬라이딩 도어를 만들어 물건을 편하게 수납하고, 주방과 거실에 조명을 매립하고, 벽을 터서 층고 를 높이고,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미리 만들어놓는 일은 처음부터 미리미리 구조를 잡아놓지 않으면 안 돼요. 제 고객들을 평생 볼 거잖아요 . 그러니 처음에는 좋았는데 3년 후, 5년 후에 불편한 집을 만들면 안 돼요. 이 왕이면 가장 좋은 걸로, 어떻게든 오래가게 신경 써야 하지요. 의자 하나, 조명 하나까지 리스트를 만들어 제안을 드리는 이유는 집에 있는 시간을 가급 적 온전히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추천 작가는 한국 분들 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아무래도 성장하는 걸 곁에서 지켜볼 있으니까 보람 이 있어요. 한국이 잘돼야 우리 모두가 더 잘 살게 되는 것도 맞고요(웃음).” 인테리어 디자인은 단순히 집을 바꾸고 꾸미는 것이 나를 위해 좋은 시간과 공간을 갖는 것. 그래서 나의 생활 방식이 점점 건강한 쪽으로 자리를 잡아 나가는 것. 그런 맥락에서 이정희 대표와 이길연 대표가 보여준 ‘합’은 무척 이상적으로 다가왔다. 권용석 팀장의 든든한 백업도. 아직 빈 벽이 많은 이 곳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지만 정교하게 완성될 것이다.
이정희 대표의 집에서 가장 압도적이고 묵직한 오라의 다이닝 테이블. 박성철 작가의 작품으로 가로 길이만 3m가 넘는다. 느티나무 원목으로 만들었다.
욕실 역시 최소한의 재료만 사용해 ‘대담한 간결함’이 돋보인다. 조명은 김민수 작가의 작품. 이 집에 들어간 거의 모든 아트피스와 공예품은 이길연 대표와 권용석 팀장, 이정희 대표가 함께 고른 것이다.
남편의 서재. 거실과 같은 쪽으로 창이 있어 겨울에도 햇살이 깊게 들어온다. 사이드 테이블은 황형신 작가의 작품. 소파와 테이블, 조명까지 또 하나의 작은 리빙룸으로 꾸민 것이 인상적이다.
거실에서 바라온 다이닝룸과 그 너머로 펼쳐지는 후원. 김홍석 작가의 조각 작품도 보인다. 이 집의 마스코트 ‘빈’은 촬영 당일 주연 역할을 톡톡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