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만의 확고한 취향과 이를 절충한 디자이너의 감각을 고스란히 더해 완성한 모노톤의 집을 만났다. 대비되는 요소가 은근하지만 탄탄한 균형감각을 자아내고 있었다.
“블랙은 모든 형태의 단순함과 우아함의 정수다.”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지아니 베르사체의 말이다. 색채 심리학의 대가이자 <색의 유혹>의 저자인 에바 헬러 또한 이 색을 ‘마법의 색’이라 칭할 만큼 단순 하지만 헤아릴 수 없는 깊이감으로 어느샌가 덜컥 매료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치동에 178㎡ 의 집을 마련한 40대 부부도 그랬다. 부부는 림디자인의 이혜림 대표에게 블랙 컬러를 메인으로 한 인테리어를 의뢰했다. “대개 저희가 먼저 클라이언트에게 레퍼런스와 함께 다양한 스타일을 제안하는 데 반해, 직접 시안을 들고 오실 만큼 취향이 명확했어요. 덕분에 구조 리모델링이나 공간 간의 밸런스 등 세세한 부분에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민할 수 있었죠. 평소 러블리한 컬러를 강조한 인테리어를 주로 선보였기에 이번 경험이 색다를 거라는 확신도 있었고요.” 이혜림 대표가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말했다. “블랙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무게감이 있어요. 하지만 인테리어에 적용될 경우에는 칙칙하고 어두운 분위기는 물론이거니와 답답한 공간이 연출될 수 있다는 점을 항상 고려해야 하죠 . 그래서 흰 벽이나 베이지 톤의 월 커버링을 통해 적절히 균형을 맞추려 했어요.” 집 전체를 둘러보면 거실과 주방 같은 핵심 공간은 블랙 컬러를 주로 사용했지만, 복도와 현관은 밝은 톤으로 꾸며 균형을 맞췄다. 하나의 공간만 떼어놓고 보더라도 오트밀색 커튼이나 화이트 톤의 외벽이나 창호 등을 배합해 두 가지 색이 대비되는 효과를 살려 과하지 않고 모던한 분위기가 감도는 공간을 구현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공 작업은 집에서 한가운데 위치한 주방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특히 블랙 컬러가 가장 많이 적용된 장소인지라 답답한 느낌을 덜어내기 위해 주방을 둘러싸고 있던 벽을 모두 허물어 거실과 연결되도록 시공해 탁 트인 개방감을 부여했다. 식탁 대신 아일랜드를 주로 사용한다는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해 중앙에 비치한 약 4m의 아일랜드는 마치 집 안의 구심점과 같은 인상을 준다. 은은하게 발색되는 금속으로 제작되어 검은 벽과 가구, 빌트인, 수납 장, 수전과도 조화로운 균형감이 돋보인다. 거실에는 까시나의 LC1 체어, LC3 소파, 놀의 바실리 체어 등 다소 건축적인 느낌을 지닌 바우하우스 스타일의 가구를 두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듯 자연스레 어울리는 가구는 굳건한 취향을 지닌 부부의 의견이 적극 반영된 것이다. 주 방에 테이블을 두지 않는 대신, 거실 한 켠에 곡선미가 돋보이는 다이닝 테이블과 체어로 멋을 낸 점도 눈에 띈다. 이 구역은 원래 발코니로 이용되 었던 공간을 확장 공사를 통해 탈바꿈시켰는데, 곡선의 조형미가 돋보이는 베르너 팬톤 체어와 아르크 오발 테이블을 두어 직선적인 느낌의 가 구로 채운 주방, 거실과는 또 다른 우아한 면모를 선사한다.
안방은 다시 가벽을 기준으로 드레스 룸과 베드룸으로 나뉜다. 마치 호텔같이 블랙& 화이트로 꾸민 베드룸은 간살 파티션으로 구분 된다. 그중 침대가 놓이지 않은 조그마한 구역은 가죽공예를 즐기는 아내가 취미 생활을 즐기는 곳으로 자리매김했다. 주방에 이어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일어난 곳은 바로 아이 방이다. 현관 바로 맞은편에 활용도가 낮아 마치 죽은 공간처럼 여겨졌던 라운지와 방 하나를 합해 만들었기 때문. 라운지와 방 사이에 있던 벽을 제거하고, 침실을 감싸는 듯한 느낌으로 새롭게 가벽을 세워 학습을 위한 공부방과 휴식할 수 있는 침실을 구분지었다. 침실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지 않는 대신 사선으로 세운 가벽에 아치형으로 입구를 내 협소하지만 깊이감 있는 침실을 구현했다. 블랙 인테리어와 더불어 부부한테는 또 하나의 바람이 있었다. “돌출된 몰딩이나 배관 등 벽 라인을 해칠 만한 요소 등을 제거했으면 했어요. 군더더기가 많아 복잡해 보이는 집을 최대한 심플하게 만들고 싶었거든요.” 이를 위해 먼저 대부분의 몰딩을 제거하고 히든 도어나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해 문을 열지 않으면 마치 하나로 이어지는 벽처럼 보일 수있도록 연출했고, 수납 문제는 대부분 맞춤 제작한 빌트인 가구를 활용해 해결했다. 배수 기관실이나 거실에 툭 튀어나온 우수관 등 꼭 필요한 요소지만 본래 위치를 변경하기 힘든 경우에는 가벽을 적극 활용해 다른 공간과 병합하거나 과감히 숨겨 깔끔함을 더했다. 마치 큰 도화지를 서슴없는 붓칠로 채우듯 부부의 뚜렷한 주관과 취향은 집 안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앞으로 부부와 아이가 함께 그려 나갈 새로운 그림은 과연 어떻게 칠해질 것인지 조심스레 기대감을 품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