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안목으로 이어진 집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쌓아온 취향과 안목이 곳곳에 스며든 집을 찾았다. 오랜 시간을 거치며 더욱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작품이 즐비한 공간에서 은은하지만 확고한 기준이 느껴졌다.
그런 집이 있다. 오래된 연식으로 여기 저기 손볼 곳이 생겨나지만, 그럼에도 익숙함에서 기인하는 편안함이 조용히 머무르는 공간. 인윤아 씨 가족이 살고 있는 집이 그랬다. “10여 년 정도 살다 보니까 고장 나는 부분이 많아지더라고요. 공사할 곳도 더러 보이고요. 차라리 이사를 갈까 싶었지만, 이 집만큼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익숙한 탓이겠죠.” 거주지를 옮기는 대신 인윤아 씨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톤업 이은주 실장에게 이 집의 리노베이션을 의뢰했다. “클라이언트와 합이 잘 맞는 경우는 드물어요.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죠. 놀랍게도 이번 시공이 제게는 그랬어요. 더구나 서로 추구하는 취향이 비슷했던 터라, 시안이 오가는 과정에서도 무척 자유로웠죠.” 이은주 실장이 지난 시간을 회상하듯 말했다. 리노베이션은 2달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이뤄졌다. 레이아웃을 대거 변경하거나 확장하는 대신 기존의 구조를 최대한 유지한 채 진행됐기 때문이다.
“시공에 가장 중점을 뒀던 부분은 기존의 것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었어요. 예술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 지금까지 수집하고 소장해온 작품이 꽤 많았거든요. 오랫동안 모은 작품이 집에서 큰 역할을 할 거라 생각했어요. 이전 집에서는 좋은 작품들이 빛을 발하지 못해 내심 안타깝기도 했고요. 어떤 공간에 어느 그림을 걸지 또 어떤 가구를 놓을지 함께 상의하면서 소장하고 있는 작품과 고가구가 온전히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구현하고자 했어요.” 이은주 실장의 말처럼 집에 들어서자마자 크고 작은 작품이 곳곳에 비치되어 있었다. 복도 끝자락에 놓인 고재 장과 조화를 이룬 홍종명 작가의 작품부터 거실의 양 벽에는 김훈 작가와 박두진 시인의 자제로도 알려진 박영하 작가의 작품이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벽에 걸려 있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이닝 공간과 침실, 심지어 현관 옆 등 집 안 곳곳에 무심한 듯 걸려 있는 작품을 발견하는 것은 이 집의 은근한 묘미다. “양가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 많아요. 저기 복도에 있는 고재 장은 친정어머니한테 받았어요. 거실에 걸어놓은 작품은 작고하신 시아버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이랍니다. 예술 작품 수집을 좋아하셨죠. 세월의 흔적이 꽤 묻어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요. 오래된 것이 주는 특유의 분위기가 있거든요. 덕분에 거실과 복도가 조금 더 특별해진 것 같아요.” 특히 거실은 부부가 가장 애정하는 공간이다. 거실을 둘러보다 보면 어느 집이나 으레 있는 TV가 없다. 이는 무의미한 TV 소리만 가득한 공간 대신 가족 간의 대화가 자유롭게 오가거나 때로는 의자나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한가로이 책과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성격의 거실을 원했던 집주인의 바람이 담긴 결과다. 이를 위해 남편과 이은주 실장의 추천으로 밝은 톤의 원목 마루 대신 검은색에 가까운 채도가 낮은 강마루를 깔고 도장 대신 도배로 흰벽을 마감해 그림이 돋보이는 갤러리 같은 공간을 구현했다. 혹여 작품을 가리지 않도록 등받이가 높은 소파는 피하되, 원래 가지고 있던 회색 패브릭 소파와도 어울릴 수 있는 가구를 찾다 놀 Knoll의 바르셀로나 시리즈 데이베드와 체어를 구매했다.
“집주인도 바르셀로나 체어를 좋아하셨어요. 흔히 볼 수 있는 블랙이나 캐멀 톤이 아니라 카키에 가까운 색이라 소장 가치가 있겠다 싶었어요.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나온 만큼 꼭 이 거실에 두고 싶다고 하니 너무 좋아하셨던 기억이 나네요”라며 이은주 실장이 설명했다. 과감한 색 선택을 시도한 주방도 눈에 띈다. 기존의 목제 장과 어울릴 수 있는 가구를 고심하다 비슷한 톤으로 구매한 테이블로 꾸린 다이닝 공간을 지나면 팬트리 공간이 등장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독특한 색으로 마감한 상하부장. 청록색의 상하부장은 집주인과 이은주 실장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 벽에는 간단한 주방 가전이나 도구를 비치할 수 있는 선반을 설치했고, 바닥은 타일로 시공해 마치 유럽의 다이닝 펍을 연상시키는 아이코닉한 공간을 완성했다. 매일 새로운 것이 넘쳐나는 요즘, 확고한 취향을 기준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그런 만큼 켜켜이 쌓인 오롯한 안목으로 꾸려나가는 공간은 쉽사리 질리거나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천천히 그리고 오래도록 사랑받을 것이다. 마치 이 집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