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복이 쌓인 낙엽이 한층 익숙했던 작년 늦가을, 양태인 디렉터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다. 통창 너머 보이던 선연한 계절의 모습을 기억하며 다시 찾은 이 곳에는 어느덧 짙은 여름의 인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변함없이 환하게 반기는 반려견 후추는 여전했지만 말이다. “처음 봤을 때 후추가 5개월이었는데, 시간 참 빠르죠? 이곳에 온 지도 2년 정도 되어가고요.” 10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아틀리에 태인과 베지터블 플라워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웨딩 및 라이프스타일 비주얼 스타일링과 컨설팅 영역에 몸담아온 그였기에, 다시금 찾아온 231㎡ 규모의 집은 여전히 그만의 감도 높은 센스가 군데 군데 포개져 있었다. 이전에 머물던 남산맨션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거처를 옮긴 데에는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 동고 동락했던 반려견이 무지개다리를 떠난 뒤 남은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반려견이 떠난 자리에는 이상한 슬픔이 남더라고요. 연인이나 가족에게서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층위의 감정이 었던 것 같아요.” 이사할 집을 알아보기에는 이것저것 따져보기 여러모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아쉬운 부분도 있었으나, 그럼에도 늘 따뜻하게 들어오는 볕과 잎이 무성한 남산을 끼고 있어 너른 여유가 머무는 듯한 이 집은 새로운 보금자리가 됐다.
별도의 리노베이션이나 시공을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이였기에 구조적인 변경이나 도장 등 대규모 공사는 거치지 않았지만, 이전 집에서는 하지 않았던 시도를 감행해 지금의 집을 완성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풀어보고 싶었어요. 산을 끼고 있어서 그런지 좋아하는 나무 소재나 빈티지한 요소를 쓰는 대신 모던한 데이베드, 화이트 테이블, 유리를 사용해봤어요. 그 결과인 셈이죠.” 프리츠 한센 PK22 라운지 체어와 묵직한 블랙 데이베드 그리고 크고 작은 작품 몇 점을 균형 있게 비치한 화이트 톤의 거실만 봐도 그의 말을 십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실로도 사용하는지라 한 켠에 둔 유리 상판이 눈에 띄는 까시나의 카를로스 카르파 데스크도 함께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면 켜켜이 쌓인 소반과 백자, 아트 북 등 다채로운 오브제를 모아둔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여행을 다니면서 하나둘 모은 소품과 지금껏 소장하고 있는 작품 등을 한쪽에 비치해 하비룸 같은 장소를 꾸린 것이다. 마주보는 구역은 다이닝룸. 너른 주방도 눈길을 끌지만 백미는 이현정 작가의 백색 석재 테이블이다. 8인용 정도의 큰 테이블이나 여럿이 너끈히 사용할 수 있는 소파 등 큼직한 가구를 즐겨 사용하던 것과 달리 오붓하게 서너 명 정도가 사용할 수 있어 새롭다고. “사실 가구를 선택할 때면 나보다는 이곳을 찾아올 사람들을 더 고려했어요. 그렇지만 여기로 오면서 조금 달라졌죠. 나에게 더 집중했던 것 같아요. 내가 편하고 내가 좋은 가구, 이 테이블도 사실 그래요.” 테이블을 매만지던 그가 덧붙였다. 소재와 디자인 모두 눈길을 사로잡는 테이블이 중심처럼 자리한 이곳은 그가 가장 중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집을 사무실로도 쓰기 때문에 클라이언트가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어요. 처음에는 거실에 마련된 데스크에서 미팅을 했는데, 점점 신뢰가 쌓이면서 친구처럼 여기서 식사 자리를 갖게 되더라고요. 요리나 와인을 낼 때 플레이팅이나 술과 음식의 조화 같은 미묘한 부분에서도 제 취향을 볼 수 있으니 알게 모르게 나에 대해서 보여주는 경우도 있죠. 가끔은 친구들을 초대해 이곳에서 놀기도 해요. 어찌 보면 마음이 열리는 공간처럼 느껴지죠.” 방문하는 이들도 대부분 이곳을 가장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다이닝룸에 마련된 유리문을 열면 마치 예술 작품처럼 뒷마당 같은 남산의 초입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
그렇지만 이곳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다름 아닌 반려견 후추다. 운명처럼 이전에 키우던 반려견과 이름이 같았던 후추는 이곳으로 이사온 후 선물처럼 그한테 찾아왔다. “숲과 풀밭이 있으니 후추가 여길 참 좋아 해요. 숲이 바로 옆에 있다는 게 참 다행이죠.” 자신을 최우선으로 했던 그의 마음에는 어느덧 후추가 가득 들어와 있었다. 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후추와 함께하는 집으로 하나둘 모양새가 바뀌어갈 만큼. “이 아이가 참 많은 것을 바꿔놨어요. 거실이나 방 곳곳에 카펫을 깔거나 제 침대 옆자리에 저 아이를 위한 작은 침대를 마련했죠. 사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저한테 있어요. 후추와 함께하는 지금, 더없이 행복하다고 느끼게 해주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