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의 풍광과 해사한 빛이 가득 스민 집을 찾았다. 클라이언트의 뚜렷한 취향과 함께 더해진 건축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의 최선은 집 안 곳곳에 또렷한 흔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창밖으로 서울숲 근방의 전경이 보이고 따스한 볕이 드는 집. 창밖의 풍경을 감상하기 위한 올블랙 임스 라운지 체어를 두었다. 소파와 로 테이블도 실외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두었다.
거실에 정희민 작가의 작품과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한 터프한 인상의 빈티지 캐비닛을 두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나눴던 대화를 기억한다. 이젠 진부할 테지만 친한 친구 혹은 친해지고픈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집을 한 번쯤 방문해보는 것이 좋다는 말이었다. 대화의 골조는 집이란 어떤 형태이든 간에 곧 머무는 사람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것. 그리고 서울숲 근방에 위치한 204㎡ 규모의 이 집 또한 앞선 대화에 한층 무게를 실어줄 수 있었다. 몇 해 전부터 클라이언트와의 인연을 맺어온 스튜디오 2F의 박소현 실장이 이 집의 인테리어와 스타일링을 담당했다. “클라이언트가 이곳으로 이사하기 전 거주했던 집도 제가 인테리어를 맡았어요. 이곳으로 이사 계획을 알리면서 다시 제게 새로운 집의 청사진을 함께 그려보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촬영을 위해 함께 방문한 박소현 실장이 회상하듯 말했다. 거실과 주방, 침실 그리고 게스트룸과 서재로 구성된 집은 전체 구조를 흔드는 대규모의 시공은 없었고, 꼭 손봐야 하는 부분에 한해서만 부분 시공이 진행됐다고 그녀가 덧붙였다. “집의 일부만 손보는 리노베이션이지만, 디테일이 필요한 작업이었어요. 함께 시공에 참여한 조소은 소장은 인테리어적인 디테일을 볼 수 있는 건축가 겸 디자이너예요. 그래서 이 작업에 적격이라고 생각했죠. 저 또한 그저 좋은 가구나 작품을 배치하는 것처럼 단순히 좋은 것만 일률적으로 나열하는 게 아니라, 품어줄 수 있는 적확한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걸 알았거든요.” 가장 메인이 되는 시공 지점은 바로 벽. 기존에는 누런 톤의 패턴 타일이 깔려 있었으나, 그 위를 뉴트럴한 톤으로 도장해 마감했다. 덕분에 패턴 등의 부가적 요소가 사라진 벽은 훌륭한 파사드 역할 또한 수행할 수 있도록 변신했다.
이탤리언 디자인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취향을 반영해 리빙 디바니 소파와 리마데지오의 커피 테이블을 두었다. 존재감 있는 가구가 뉴트럴하게 도장한 실내와도 조화롭다.
집 내부로 통하는 복도에는 여러 작가의 작품을 걸어두었다. 가장 크게 보이는 작품은 이배 작가의 것.
현관을 열자마자 보이는 카우스의 작품. 집주인의 위트를 일부 엿볼 수 있다.
현관 입구의 맞은편 벽에 걸린 채 위트를 발휘하는 카우스 작품을 시작으로 거실까지 길게 난 복도 양벽에 전시된 이배와 제여란, 주명한 작가의 작품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차례로 걸릴 수 있었던 데에는 이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실은 작품의 비중이 한층 커진 공간이다. 대개의 집이 그러하듯 메인이 되는 큰 벽에 TV를 둔 다음 이를 기준으로 가구를 배치하는 시도는 기피했다. TV가 들어갈 벽에는 정희민 작가의 작품이 대신했고 그 아래 터프한 빈티지 무늬목 사이드 보드를 놓았다. 그리고 여타 가구의 배치에 있어서는 서울숲과 한강이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너른 창을 최대한 살렸다. 이탤리언 디자인을 좋아하는 집주인의 취향에 맞춘 리마데지오의 로 테이블과 리빙 디바니 모듈 소파는 모두 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두었다. 특히 언제라도 편히 풍광을 즐길 수 있도록 통창 바로 앞에 올 블랙 톤의 임스 라운지 체어를 놓았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도가 한층 더 느껴진다.
다이닝 한 켠에는 여섯 명이 너끈히 사용할 수 있는 리마데지오의 대리석 테이블을 두었고 폭신하고 품이 있는 의자를 원했던 집주인의 취향에 맞춰 메리디아니 다이닝 체어를 두었다. 그 위를 장식하는 셉티마 조명이 다이닝 공간의 우아한 무드를 극대화한다.
침실로 향하는 작은 복도. 유리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옆 공간은 드레스룸으로 활용한다.
주방에 둔 아일랜드에도 변화를 꾀했다. 기존에 있던 검은 아일랜드 대신 가장자리를 빗각으로 처리한 대리석 상판의 아일랜드를 비치했고, 포인트를 주기 위해 월넛 소재의 바 체어를 두었다.
창과 그 너머의 풍경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커튼을 설치하는 데에 있어서도 고심을 거듭했다. 길게 레일을 설치해 벽과 창의 전체를 일률 적으로 가리는 식으로 커튼을 설치하는 대신, 창마다 작게 레일을 깔고 커튼은 햇빛을 막는 것보다 걸러주는 느낌을 내는 천으로 선택했다. 그 결과, 중성적인 톤의 거실에 놓인 가구 사이로 햇살이 조화롭게 들어서고, 가리지 않은 창과 창 사이의 벽에는 작품이나 오브제를 걸 수 있는 여지 또한 남겼다. 거실과 마주한 다이닝 공간의 인상도 달라졌다. 기존의 아일랜드는 묵직한 블랙 톤이었지만, 뉴트럴한 톤의 집 전체 무드와 어우러질 수 있도록 변경했다. 대리석 상판은 빗각으로 모서리를 마감했고, 여기에 방점처럼 둔탁한 외관의 월넛 바 체어를 둔 점이 눈길이 간다. 덕분에 바나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식탁의 역할까지 겸할 수 있게 됐다. 아일랜드 옆에는 널찍한 리마데지오의 6인용 대리석 테이블을 별도로 두었다. 이전에는 나무 테이블을 사용했지만, 아일랜드와의 조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의 일환이었다. 이와 함께 푹신한 다이닝 체어를 원하는 집 주인의 취향에 맞춰 메리디아니의 벨벳 다이닝 체어를 두고 위에는 높은 천고의 장점을 십분 살려 아티초크의 전신인 셉티마 조명을 달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집의 특성상 높은 천고와 탁 트인 창 때문에 개방감이 유달리 부각되지만 그래서 힘 있는 작품이나 가구가 더 없이 존재감을 발휘되는 듯했다.
침실의 모습. 무게감 있는 나무로 제작한 헤드보드와 푸른 벨벳 패브릭의 자노타 라운지 체어의 합이 좋다. 침대는 해스텐스
해의 방향에 따라 집의 분위기가 바뀐다. 볕과 그림자의 적절한 조화가 인상적인 집 안 풍경.
특히 어느 가구 하나 과하게 부각되지 않고 고루 눈에 들어오는 적절한 균형감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오랜 시간 몸담아온 내공의 결 과처럼 다가왔다. 그렇지만 박소현 실장은 사실 클라이언트의 명확한 취향과 진심이 이러한 공간을 만드는 핵심이라 말했다. “균형과 여백을 선호했던 터라 구태여 이런저런 시도보다 힘있는 가구와 작품 그리고 그 사이의 적절한 거리감에 신경 썼어요. 무엇보다 이 집에 진심인 모습을 많이 보여줬어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일방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별로 어울리는 가구를 고심하는 등 활발히 소통하며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것만큼 큰 원동력이 없거든요. 클라이언트뿐만 아니라 저와 조소은 소장 모두 자연히 이 집에 진심이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저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제안하고 받아들이는 일방향의 진행 대신, 적극적으로 자신의 취향을 어필하며 자신을 위한 집을 꾸려가는 클라이언트의 진심과 열정은 건축가와 인테리어 디자이너 그리고 클라이언트를 한 팀처럼 연대하게 만드는 가장 큰 힘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고 그는 덧붙였다. 간혹 어떤 현장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라는 질문에 주저없이 이곳을 택했다는 박소현 실장의 대답은 좋은 집이 무엇인가라는 또 하나의 답을 제시하는 듯했다. 머릿 속에 그려온 집의 모습을 구현해주는 이와 집에 자신을 녹여내는 이의 합이야말로 오래도록 살 수 있는 집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 않을까. 서서히 해가 저무는 창을 뒤로하고 오래도록 남는 여운을 만끽하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