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안젤름 라일레 Angelm Reyle와 건축가 타냐 린케 Tanja Lincke 부부에게 2008년은 특별하다. 안젤름 라일레는 그해 경매에서 독일 항만 경찰 본부의 거대한 부지를 구입했고, 타냐 린케와 사랑에 빠졌다. 안젤름은 젊은 나이에 국제적으로 성공한 스타 미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경제 위기를 맞아 한때 이 땅을 팔아버리려고 했지만 타냐의 만류로 남겨두었고, 2017년 그들만의 공간을 완공하게 되었다.부부는 2명의 자녀와 함께 거주할 집과 작업실이 필요했다. 슈프레강가에 콘크리트로 새로 집을 지었고, 4채의 작업실은 기존 항만 경찰 본부 건물을 이용해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이들의 공간은 마치 원래부터 존재했던 작은 공원처럼 보인다. 건축디자인은 전적으로 타냐의 의견을 존중했고, 안젤름은 가구 디자인에 앞장섰다. 타냐는 낡은 건축물에 치장을 하는 것은 지나친 보톡스와 같다고 생각해서 미니멀한 디자인과 색감을 선보였다. 1970년대의 이 지역 분위기와 이 지역과 새로운 건축물이 어울려야 한다는 생각도 확고했다. “타냐는 명확한 형태를 선호하지만 나는 화려한 색상과 재질에 끌려요. 우리는 논의를 거쳐 타협처럼 느껴지지 않는 낭만적인 결정을 도출해냈어요.” 안젤름은 우리 둘의 취향은 완전히 다르지만 결국 생산적인 협업을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사실 처음에 그는 높은 층고를 가진 3층 건물을 제안했다. 타냐는 거주용 건물을 설계한 적이 없는데다 가족 모두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기에 건축가의 입장에서 신중하게 접근했다. 더군다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방치 되었던 이곳의 역사를 활용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타냐의 생각은 안젤름이 미술가로 자신을 매료시키는 소재에서부터 작품의 영감을 얻는 과정과 흡사하다. 타냐는 슈프레 강변에 위치한 이곳의 지리와, 과거는 물론 현재를 통합하는 것에 대해 매력을 느꼈다고 설명한다.
“슈프레 강과의 연결이 특히 중요했는데, 집이 2층 높이에 위치한 것은 강을 잘 볼 수 있도록 한 의도뿐 아니라 작업실이 있는 부지가 강물과 차단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어요. 새로 만든 집과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한 작업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타냐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건축가로서 한발 물러서서 특정 장소에 어울리는 접근법이 무엇인지 느끼기 위해 노력한다. 다소 직관적인 첫 번째 단계에 이어 변화와 개입을 견뎌낼 수 있는 강력하고 일관성 있는 개념을 발견하는 과정이 이어진다.
건축물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주하는 사람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적응력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건축물은 재료의 선택과 결합으로 아우라를 만들어요. 건축물은 사람과 같아서 나이를 먹을수록 아름다움을 재발견할 수 있어요. 우리가 과거의 폐허를 활용한 공간을 조성하고 역사의 흐름을 만끽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안젤름 라일레는 포일 페인팅과 도자 조각 연작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작가다. 은박지, 고철, 네온, 아크릴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며, 디올 등 브랜드와의 디자인 협업도 활발히 진행한다. 그런 이유로 가구는 안젤름이 대부분 담당 했는데, 강가에 집을 짓기 위해 정원에서 잘라낸 두 그루의 나무로 어린이 침대, 식탁, 계단 난간을 만들었다. 옷장과 찬장, 방의 칸막이 역할을 하는 가구는 타냐가 디자인했다. 친구들도 그들의 새로운 공간 디자인에 참여했는데, 낭만적인 식탁 의자는 세바스티안 헤르크너의 선물이다. 아트 컬렉션의 면모도 화려하다. 미술계의 거장 피터 할리, 프란츠 웨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등의 작품이 서재를 장식하고 있다. “대부분 나와 인연이 깊은 미술가의 작품들이에요. 특히 피터할리는 내가 젊은 시절 동경했던 우상이었어요. 그런 그가 서로 작품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는 게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뻤어요. 귄터 포그도 마찬가지예요. 프란츠 웨스트는 2012년 사망하기 전 3년간 나와30여점의 작품을 공동 작업 했습니다. 우리의 협업이 내 작품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어요.” 무라카미 다카시가 안젤름의 작품을 많이 소장한 빅컬렉터이기에 그가 보내 온 작품도 있다. 사랑스러운 팝아트 작업을 하는 무라카미가 안젤름의 작품을 좋아한다니 흥미롭다. 아마도 무라카미는 안젤름이 작업에서 추구하는 마찰과 에너지, 불협화음에 매혹된 것으로 보인다.
안젤름은 이런 독특한 예술적 성향을 인테리어에도 적용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공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정원이다. 그들은 뉴욕의 하이라인을 보고 식물을 너무 많이 심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닫고 계획을 변경했다. 이는 정원을 가꾸는 이들이 저지르기 쉬운 전형적인 실수인데, 정원이 비옥한 강변에 위치해 모든 식물이 너무나 빨리 자라기 때문이다. 꽃과 나무가 대지를 뒤덮으면 그들이 창조한 아름다운 공간을 가리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이라인의 매력은 기하학적 공간과 야생식물의 균형이었어요. 우리는 역사를 지우고 싶지 않아서 옻나무 와 자작나무, 다년생 식물을 심었습니다.” 미술가의 작품은 작업실의 위치와 규모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안젤름 역시 아름다운 숲과 강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살면서 작업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널찍한 작업실에서 대형 도자 조각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인근 벼룩시장에서 1970년대 만든 꽃병을 발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안젤름은 우연히 1970년대 만든 현란한 색상의 꽃병에 반했다. 그는 이 낭만적인 작업실에서 다시 즐겁게 작업하고 있다. 그렇게 이곳은 베를린의 예술 명소가 되었고, 빔 벤더스 감독이 럭셔리브랜드 질 샌더의 패션필름을 촬영 하기도했다. 이들의 집이 유명해지자 미술가 토마스 사라세노, 요린데 보이그트, 알리차 콰데 그리고 갤러리스트 요한 쾨닉도 베를린 도심을 떠나기 시작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러한 움직임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안젤름과 타냐의 영향으로 베를린의 문화 지도가 바뀌게 된 것이다. 이들 부부는 아침이면 새소리에 눈을 떠서 아이들을 자전거로 학교에 데려다준다. 저녁이면 아이들을 재워놓고 정원을 산책한다. 독일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자리에 있는 낭만적인 이곳에서 끊임없이 영감을 받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