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대신동에 위치한 이진용 작가의 작업실
이진용 작가가 부산 대신동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했다. 지난 30년간 해운대에서 여러 곳의 작업실을 운용했는데, 이제 바다가 아니라 산과 마주한 곳에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싶었다고 한다.
대신동은 그가 태어난 고향이자 첫 작업실이 있었다. 언젠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서 유심히 봤던 집이 있었다. 구덕산 바로 아래 지어진 이 4층집을 마음에 둔 것은 7년전 이었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거실 유리창에 대나무와 벚나무가 닿을 만큼 구덕산이 가까운 아름다운 집이라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운명적으로 이곳을 소유하게 되었고, 리노베이션을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갤러리를 연상시키는 깔끔한 화이트 공간으로 새롭게 개조했으며, 2층 야외 테라스등 몇몇 공간은 직접 만들었다. 해운대에는 대형 작업을 하기 위한 작업실을 여전히 남겨두었으나, 이제 이 대신동 건물이 그의 중심축이다. 건물 지하 1층, 1층, 2층, 4층은 작업실이고, 3층은 거주 공간이다. 어머니와 아내, 강아지는 3층에 거주하며, 이 작가는 여러 층의 작업실을 오가며 작업한다. 사실 그의 작업실은 박물관보다 더 박물관 같은 곳으로 유명하다. 그는 침향, 카메라, 시계, 책, 보이차, 악기등의 메타 컬렉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으며, 시간을 수집하기 때문이다.
수집은 그의 작품 활동과 더불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컬렉션 자체가 작품이다. 이런 이유로 작가는 컬렉션이 알려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그의 컬렉션은 과시가 아니라 작품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수집품은 시간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며, 그가 즐겨 그리는 책의 경우는 이미 고등학교 때 수 만권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다. 몇 년전에는 영국에서 펭귄 브랜드 책만 2만권을 수집하기도 했다. “내 책장 하나를 미술관에 전시하면 그것이 바로 작품이 됩니다. 컬렉션은 내가 필요한 물성의 시간을 모으는 것이며,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 수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컬렉션 에너지의 파장이 영양분이 되고 작품의 힘이 되지요.” 이처럼 컬렉션에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 사례는 미술사에서 종종 찾아 볼 수 있는데, 거장 렘브란트와 고갱 역시 다채로운 오브제 컬렉션에서 창작의 힘을 얻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그가 컬렉션의 실물이나, 이를 촬영한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이 작가는 오랫동안 이미지를 마음에 담아두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다. 예를 들어, 책 그림이라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실제의 책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 속의 책을 그리는 것이며, 그것이 그의 작품의 매력이다. 구상이 아니라 추상인 것이다.
지난해 박여숙 화랑에서 열린 38번째 개인전에서 가로로 놓인 책 그림 연작을 선보였는데, 하이퍼 리얼리즘으로 오해받을 만한 섬세한 화풍이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그 그림은 한장 한장 쌓인 시간을 그린 것이지 단순히 책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아니었다. 미술가에게 작업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작업실의 건축 디자인, 위치와 크기로 인해 작품이 영향을 받기 때문 이다. 이번 이사만 해도 1년 넘게 걸렸으며, 트럭이 100번쯤 해운대와 대신동을 오갔을 만큼 짐이 많았다. 아직도 정리하는 중이지만 30년 만에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만큼 마음이 평안하다. 특히 이제는 예전처럼 출퇴근을 하지 않고 한곳에서 작업과 거주를 하게 되었기에 작업시간이 더 늘어 났다. “오늘이 몇월 며칠 몇시인지도 모르고 작업만 합니다. 작업을하다 지치면 잠시 눈을 감았다 또 작업을 해요. 잠자는 시간, 밥먹는 시간이 따로 없어요. 하루 종일 신나게 작업을 합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작업이 재미있어서 하는 거라서 피곤할 줄도 몰라요.” 공자의 말씀 대로 즐기지 못하면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오래전부터 몸으로 느끼고 실천해왔다.
즐긴다는 것은 진심이라는 의미이며, 좋아하는 것을 곁에 두면 긍정적인 에너지를 갖게 된다. 잠시 잠이 들었다가도 작업할 생각에 금세 설레서 일어난다니, 그의 일중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공간 가득히 작품과 컬렉션이 있으니 일중독을 유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관 앞에 새로심은 로즈마리가 아름다운 1층에는 그의 오브제 레진 연작 ‘인 마이 메모리’가 있다. 선사시대에 생성된 호박속 모기처럼, 레진 안에 그의 컬렉션을 쏙 집어넣은 작품이다. 레진이라는 정지된 시간에 오브제를 넣어 더 이상 변화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1987년 시작한 이 연작은 그간 전시에서 여러 번 선 보인 적 있으며,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종의 타임캡슐과 마찬가지로, 매년 관심을 가진 컬렉션을 레진 속에 가두어 영원히 보관하는것. 이작업은 그래서 그에게 일기와도 같다.
2층에는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창밖을 배경으로 책장과 보이차 테이블, 작업실이 펼쳐진다. 그는 보이차를 함께 마신다는 것은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드는 행위라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시각적으로 감동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미술가이기에, 차를 마시는 것과 미술이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 인연은 진심을 다해서 만들어야 한다고 믿기에, 작업실에 손님이 온다고 하면 미리 시뮬레이션까지 해본다. 그래서 최소한 30년은 발효되어야 마실 수 있는 보이차 컬렉션은 그의 중요한 행위이며, 다구와 다기구성 역시 작품과 같다. 전시를 위해 해외에 갔다 수집하게 된 오르골과 축음기의 아날로그 음악을 차 한잔과 곁들일 수 있다. 2층부터 4층까지 연결된 중정은 햇살이 잘 드는 것은 물론이고, 환기가 잘 되어 결로 현상을 차단한다. 3층 거주 공간은 자작나무로 수납장을 만들어 지극히 깔끔하다. 작업 공간과는 다른 고즈넉한 분위기가 돋보인다. 북유럽 가구로 휴식 공간을 만들었으며, 자작 나무문을 하나씩 열어볼 때마다 그 깔끔한 정리 정돈에 놀라게 된다. 새로운 작업실의 기운을 받아 신작도 시작했다. 작품이 완성되어야 전시를 할 수있으니 작업이 더욱 즐겁다. “최근 지하 작업실에서 두개의 커다란 의자를 그리고 있어요. 하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곱게 나이가 들었고, 다른 하나는 거만하고 거친 느낌이지요. 누군가를 품어 줄 수 있고 몸을 맡길 수도 있는 것이 의자이기에, 사람이 변하는 것처럼 의자가 변하는 모습에 매혹되었습니다.”
이렇게 사실적인 그림이 그의 눈이 아니라 마음에서 나왔다니 다시 한번 놀랍다. 그가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의미를 알 것 같기도 하다. 또한 그는 <팔만대장경>을 소재로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해인사를 찾아 그 이미지를 마음에 품는 중이기도 하다. “보는 것이 그리는 것이다”라는미술가 밀레의 명언에 작가가 되기를 결심한 것이 그가 13세때의 일이었다. 그때 부터 그는 47년간 붓 한 자루로 자수성가해 지금의 작품 세계를 완성했다. 이 고요한 곳에서 그는 신선처럼 노닐며 작품을 만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한한 자유를 감당해야 된다는 뜻이기에, 그는 이곳에서 최상의 에너지로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환갑을 맞아 작가로서 새로운 수확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신년 계획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