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m의 높은 천고를 자랑하는 선큰 가든. 키 큰 나무숲이 연상되는 이곳에 초록 식물과 크림색 가구가 온기를 더한다.
‘훌륭한 것을 많이 보아라! 이류나 삼류가 아닌 최고의 것을 보게 되면 당신은 점차 훌륭한 것에 눈이 뜨일 것이다.’ 미술사학자 이내옥이 쓴 책 <안목의 성장>에는 일본 미호박물관 설립자가 추구했던 정신을 적어놓은 짧은 귀를 만날 수 있다. 사실 이 과정에는 꽤 진득한 시간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안목을 틔우는 데 정답은 없지만 그런 눈을 가진 사람, 그의 공간을 통해서라면 효과는 가장 확실하다. 파올라 렌티, 포졸리 등 엄선된 이탈리아 수입 가구를 선보이며 하이엔드 주거&오피스 공간 인테리어를 선도 해온 선혁. 최근 삼성동 조용한 주택가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이곳을 찾았다. 안으로 들어서자 요즘 가장 핫한 아티스트 다니엘 아샴의 고대 유물처럼 화석화한 ‘전화기’가 눈길을 끈다. 마치 이곳이 ‘소통’의 공간임을 말해주는 듯한 분위기.
1층 거실에서 바라본 테라스 풍경. 비비드한 컬러감이 돋보이는 파올라 렌티 가구는 실내외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2층 오피스와 연결된 야외 공간. 특유의 질감과 팝한 컬러 조합이 돋보이는 의자에 너른 테이블, 여기에 파라솔까지 더하니 휴양지 리조트 느낌이 물씬 난다.
이곳에서는 선혁 김용남 대표의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컬렉션과 예술품, 아트피스적인 가구가 한데 어우러진, 스토리가 있는 큐레이션을 만날 수 있다. 사실 이곳은 김 대표가 직접 건축과 설계 단계부터 인테리어 시공 및 스타일링까지 토털 프로젝트 매니저 역할을 했던, 누군가가 거주했던 집이다. 8년 전 고쳤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만큼 문이며 벽지, 바닥재 어느 하나 낡고 틀어진 것 없이 반듯하니 얼마나 완벽한 시공을 추구했는지 짐작이 간다. 27년간의 축적된 노하우와 깊이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며 마치 투어하듯 공간을 보고 머물고 누리며 선혁이 지향하는 라이프스타일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편한 동선과 수납, 완벽한 마감은 기본. 특히 그녀의 수납 아이디어에는 ‘비기지적인 상상력’이 발휘된다. 지나치기 쉬운 벽체나 슬라이딩 도어에 안주인만 알아차릴 수 있는 히든 포켓을 숨겨두는 식이다. 김 대표는 인테리어 현장에 갈 때마다 ‘내가 만약 이 집에 산다면?’이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고. 집주인의 마음으로 현장을 대하기 때문에 도장 하나도 조색한 그대로 쓰는 법이 없다. 색을 수십 번 섞어본 후 조명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비교해가며 그 공간에 꼭 맞는 색을 만들어내다 보니 어디에서도 같은 색을 찾기 힘들 정도다. 밑바탕을 잘 그려놓은 만큼 이곳에 놓인 가구며 작품, 오브제는 어느 하나 어울리지 않는 것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선혁의 아카이브&디자인 스튜디오
박공지붕 아래 키 큰 장, 푸른빛 의자의 조화가 돋보이는 미팅룸. 인테리어 상담을 위한 공간으로 이곳에서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가 소통된다.
노상균 작가의 작품이 반짝이는 저 너머에 파올라 렌티 샘플룸이 자리한다. 이곳에서 600가지가 넘는 컬러와 소재를 직접 확인해볼 수 있다.
공간은 크게 지하 1층과 로비층, 1층, 2층 총 4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선큰 가든, 정원, 중정, 테라스 등 다양한 외부와 연결되어 있어 아웃도어 가구 파올라 렌티를 전시하기에도 더없이 좋다. 도심 한복판이지만 아침에 모닝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마치고 책을 보다가도 한 발짝만 걸어 나오면 자연 속에서 리프레시할 수 있다. 오랜 팬데믹 시기로 바깥 활동이 제한되면서 오히려 집의 다양한 기능이 부각되고 있는 요즘의 트렌드를 반영하는 ‘하이엔드 아웃도어 라이프’.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파올라 렌티를 국내에 소개하는 것도 오로지 그 이유다. 파올라 렌티의 가구는 기존 아웃도어 가구의 딱딱하고 투박한 느낌 대신 형광 핑크, 민트 등 상큼한 색감에 단순한 디자인으로 실내에 두어도 전혀 손색없을 만큼 세련되다. “유럽을 다니다 보면 집집마다 테라스를 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도 꼭 마당 있는 전원주택, 숲이 우거진 교외가 아니더라도 아파트에서도 아웃도어 라이프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으면 해요.” 녹색의 싱그러움이 가득한 푸프에 앉아 있노라면 휴양지 리조트 테라스에 있는 듯 금세 기분이 좋아진다.
벽면을 채운 크고 작은 그림 덕에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복도가 근사한 전시 공간이 됐다.
조지 나카시마, 찰스 임스, 샬롯 페리앙 등 뮤지엄을 방불케 하는 20세기 빈티지 가구 컬렉션.
이 공간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층고 4m 높이의 선큰 가든은 어쩌면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시그니처 포토존이 될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공조 시설을 갖춰 지상과 같은 컨디션으로 자연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완벽한 여건에서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는 것이 ‘선물’ 과도 같다. 삶과 공간에서 예술의 아름다움과 힘을 누구보다 확신하는 김 용남 대표. 이쯤에서 작가로도 이름을 알리고 있는 그녀의 작품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시실에서는 한창 설치작품 ‘리플렉션2 Reflection2’가 전시 중이다. 옛 전통 2단장을 현대적 물성인 유리로 표현한 그녀의 작품은 지금으로부터 과거로 향하고 있으며, 과거로부터 지금을 투영하는데 그것은 바로 여기라는 공간이자 자신을 상징하는 아카이브다. 그녀가 그토록 오랜 기간 축적해온 아카이브를 어떻게 다양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하고 변모시킬 수 있을까…. 이처럼 시간을 초월하는 ‘지속 가능성’은 리사이클 친환경 가구 파올라 렌티와 100년 전통의 포졸리가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과도 맞닿아 있다. “이탈리아 클래식을 대표하는 가구 포졸리는 유럽에서도 드물게 18세기 전통 제작 기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요. 유럽 생활 중 포졸리 공장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백발의 숙달된 장인들이 모든 공정을 예부터 내려오는 방법으로 하나하나 완성해가는 모습에서 큰 감동을 받았죠. 가구를 주문하고 몇 달을 손꼽아 기다리던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장인의 부고 소식과 함께 더 이상 가구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며 계약금을 돌려주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시작된 포졸리와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내 공간에서 더 빛을 발하는 네소 테이블. 대리석 상판의 환상적인 무늬가 특징.
1층에 자리한 메인 거실 공간. 그리너리한 색감과 공예적인 직조 방식이 돋보이는 러그 하나만으로도 자연을 집 안으로 들일 수 있다.
클래식은 더 화려하고, 더욱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한 것에 관심을 두다 보면 과시적이거나 헛된 부를 부추기기 쉬운데 1층에서 만날 수 있는, 절제된 디자인의 포졸리 가구는 화려한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거부감 없이 귀한 예술품으로 느껴진다. 유럽의 선조들로부터 내려온 가구와 작품은 어떻게 저토록 격조 높은 품격을 지녔을까. 그것의 바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가치를 둔 태도에 있다. “유럽 친구들이 할머니가 물려준 다 해지고 닳은 앞치마를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봤어요. 유럽인들의 이런 정신에서 위대한 예술품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요.” 그녀가 추구하는 공간 디자인 역시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다. 마치 편안하면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깃든 클래식처럼 말이다. 가구는 물론 물건에 대한 애정 또한 각별한 그녀는 여고 시절부터 그저 오래된 것이 좋아 인사동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한 점 한 점 모으기 시작했단다. 그때의 설렘을 시작으로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수십 년째 이어오고 있는 빈티지 컬렉팅은 2층에 자리한 그녀의 오피스에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
클래식하면서도 올드하지 않고 세련미가 느껴지는 포졸리 가구.
전시실에서는 21광주비엔날레 수상작인 ‘리플렉션2’ 전시가 한창이다. 앞으로 전시뿐 아니라 건축가, 사진작가, 미술평론가의 문화 강좌도 마련될 예정이다.
현관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벽에 놓인 아트 퍼니처와 옻칠 오브제는 전통을 재해석한 김용남 작가만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듯하다.
‘아름다운가’
이것이 바로 아이템을 고르고 스타일링하는 그녀만의 기준이다. 아름다움은 좋은 물건을 고를 때는 물론이요, 삶을 꾸리며 세상과 만나는 모든 일을 포괄한다. 길 가다 어떤 사물을 대할 때도, 공중도덕을 지켜야 하는 순간에도 ‘이것은 아름다운가’라는 질문이 감각적으로 튀어나온다. ‘…무엇이든지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이 유명한 문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아름다운 마음의 눈이 작품이 되고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