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욱 작가는 무경계의 작업을 하고 있지만 멈춰 있었던 적이 없다. 호기심과 끈기를 무기 삼아 끊임없이 길을 만들어가는 그를 새로운 갤러리에서 만났다.
새로 지은 갤러리 건물 지하에서 포즈를 취한 허명욱 작가. 지하이지만 빛이 들어오는 코너에 나무를 심어 시적인 공간이 됐다.
사진, 회화, 조각, 옻칠. 자신만의 시각과 재해석으로 다양한 분야를 오가는 허명욱 작가는 최근 그 어느 때보다도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올해 9월에는 파리 메종&오브제에 프린트베이커리 전속 작가로 참여해 큰 호응을 얻었으며, 에르메스와는 판교 매장에서 대형 아트워크를 진행했다. 용인에 있는 작업실 옆에 새로 지은 갤러리에서 그를 만난 날은 주말이었지만 공방은 분주했다. 그는 12월 2일부터 청담동 분더샵에서 진행되는 개인전 <Overlaying>을 앞두고 있다. “이곳은 작품만 따로 모아서 보여줄 갤러리 공간을 지은 건데, 처음 계획대로 완성되지는 않았어요. 우여곡절이 좀 많았죠. 그래도 넓은 지하와 1층에 작품을 두고, 가구와 운동기구 등을 두어서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방문객이 왔을 때 둘러볼 수도 있어요. 지하는 제가 직접 작품 배치를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어 유용하고요.” 허명욱 작가는 한창 비가 많이 내렸던 때 물이 차서 작품과 가구를 위로 급하게 올려야 했는데 그 자체로 또 자연스러운 배치가 마음에 들어서 지금처럼 그냥 두었다고 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소년 군상 작품. 아톰의 머리 형태를 본뜬 딴 모자 같은 가면을 씌울 수도 있다.
꼭 필요한 기둥 외에는 공간을 시원하게 터서 다양한 크기와 종류의 작품을 전시할 수 있다.
아라리오 갤러리의 전속 작가였을 때 선보였던 옻칠 작품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소년 작품.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 지은 갤러리 건물도 박공지붕 형태다. 시원하게 뻗은 천고는 삼각형 지붕과
만나 안정감을 이룬다. 허명욱 작가가 좋아하는 검은색 작품과 가구, 오디오 등을 자유롭게 배치했다.
갤러리 건물은 옆에 지은 두 개의 작업실처럼 세모 지붕 형태지만 외벽은 적벽돌 대신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1층에는 주로 검은색 작품과 가구를 두었는데 내부의 콘크리트와 검은색의 만남이 묵직하면서도 쓸쓸한 초겨울과 몹시 잘 어울렸다. 색이 쌓이면 결국 검은색이 되고, 검은색이야 말로 모든 색을 포용하고, 다른 색을 돋보이게 한다는데서 매력을 느낀다는 허명욱 작가는 그래서인지 언제나 검은색 의상을 입는다. 위에서부터 자연 채광이 은은하게 내려오는 지하에서는 그가 아라리오 갤러리 전속 작가였을 때부터 현재까지의 작품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갤러리 로얄에서 진행했던 <Trace> 전시에서 소개한 ‘문’ 시리즈, 하나의 스틱을 만들어 촘촘히 이어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는 ‘스틱 시리즈’, 설치작품으로 선보인 옻칠한 용기 작품들 그리고 어린 시절 그의 모습을 본뜬 ‘소년 군상’들은 성인이 된 허명욱 작가의 작품을 마주보고 있다.
2016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설치작품으로 선보인 옻칠 용기. 노란빛으로 옻칠한 용기 200여개는 누군가에게 보내진 후 각기 다른 쓰임으로 사용되다 돌아왔다. 개개인의 환경과 사용 용도가 모두 달랐기에 돌아온 옻칠 용기 또한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옻칠의 자연적인 특성과 시간의 축적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작품.
작품은 구상과 드로잉에서부터 시작된다. 생각날 때마다 끊임없이 드로잉하고 스케치한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나를 만든 것 같아요. 화가 났을 때 방에 서 있는 아톰을 보고 있으면 위안이 됐고, 남들과 똑같은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점심도 먹지 않았죠(웃음). 정해진 시간에 모두 똑같이 밥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 왠지 싫더라고요. 새것이 싫어서 새 실내화를 비 오는 날 웅덩이에 적시고, 새 청바지는 바위에 문질러 워싱해서 입었죠.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런 기억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가요. 그게 곧 저의 본성이었던 거예요.” 허명욱 작가는 보통의 작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여러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그를 누군가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정해진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길을 개척해나가는 힘이 있다. 사진이나 조각, 옻칠은 길을 만들 수 있는 매개체가 됐을 뿐이다. 그래서 작품을 보고 있으면 분야를 국한할 수가 없다. 공예, 회화, 드로잉, 조각이 과정에서부터 자유롭게 얽혀 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나온 부산물들이지만 한데 모아두니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처럼 아름답다.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도구나 물품은 모두 자리가 정해져 있다. 이렇게 시간을 단축하면 작업에 더욱 몰두할 수 있게 된다고.
하지만 ‘쌓는다’, 즉 레이어링의 과정은 변함이 없다. 하나의 트레이를 만들기 위해 40회 이상의 과정이 포개져야 하고, ‘문’ 시리즈는 촬영한 사진 위에 드로잉하고, 다시 사진을 찍어 또 드로잉하는 과정을 반복한 것이다. 그가 빈티지를 좋아하는 것도 시간이 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것을 이해할 때 관람객은 작품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아름다운 색감 때문에 사진이 잘 나온다는 이유로 허명욱 작가의 옻칠 트레이나 테이블웨어를 구입했던 이들도 그가 작은 옻칠 접시 하나를 만드는 과정을 보고 나면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색을 만들고, 칠하고, 사포로 벗겨내는 작업 과정은 반복적이지만 어느 하나 똑같은 작품이 없다.
“이번에 분더샵에서 하는 개인전은 작품을 넘어 제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요. 전시 소개글을 읽고 전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면 좋겠어요.” 허명욱 작가는 요즘 들어 앞날을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아직 죽음을 말하기에는 이르지만 어느 날 자신이 사라져도 허명욱이 추구했던 가치와 작품은 그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고,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제주도에서 이를 위한 프로젝트를 준비중이다. 미래의 시간을 어떻게 쌓아갈지 작품으로 치면 밑작업을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확실한 주관이 있었던 어린 소년은 이제 중년의 작가가 되어 자신이 만든 작품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허명욱 작가는 매일 오늘의 색을 만든다. 그날의 날씨, 기분, 환경에 따라 결코 같은 색이 나올 수 없는 그날만의 색이다. 이를 바탕으로 칠을 하고, 붙이고, 벗겨내는 무경계의 작업이 매일매일 진행 중이다. 수행하듯 만들어낸 오늘의 과정이 그가 남기고 싶어하는 미래의 색으로 찬란하게 태어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