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년을 맞은 한미사진미술관이 그동안 쌓아온 시간과 사진 예술의 확장을 꿈꾸며 ‘뮤지엄한미’로 새롭게 태어났다. 압축된 시간과 그 밀도의 힘으로 가득 찬 공간은 자체로 반짝거렸다.
고즈넉한 풍경과 다정한 분위기가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삼청동길을 한가로이 산책하다 보면 그 길의 끝자락,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 ‘뮤지엄한미’를 만나게 된다. 본래 한미사진미술관 별관이 있던 곳 바로 옆이다. 밝은 색 벽돌로 올린 네모반듯한 건물이 북악산 자락의 풍경과 어우러져 원래 그 자리에 있은 듯 자연스럽게 자리했다. 단정하고 깔끔한 인상을 주는 여러 개의 건물은 바깥에서 보면 분명하게 구획되어 있지만, 실내로 들어오면 각각의 건물이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세 개의 동이 3차원으로 교직하는 구조는 흐름에 따라 관람객으로 하여금 순환하게 하는 기오헌 건축사사무소 민현식 건축가의 설계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중정인 물의 정원이 있다. “미술관이란 특성상 관람객을 수용해야 하는 공공성을 띠어요. 강압적으로 동선을 제한하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영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어요.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 물의 정원을 중심축으로 선회하는 동선은 작품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를 향유할 수 있게 합니다.” 뮤지엄한미의 김지현 학예연구관이 말했다.
삼청동은 한옥보존구역과 자연경관보존구역 등 각종 건축 규제가 엄격한 편이다. 특히 고도제한구역으로 지정돼 높이 8m가 넘는 건물은 지을 수 없다. 뮤지엄한미 역시 최대 높이가 7m로 제약을 받았지만, 모든 건물에 박공지붕 양식을 차용해 최대한 공간감을 살렸다. 책을 엎어놓은 모양처럼 뾰족한 지붕은 뮤지엄한미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특징이다. 전시가 시작되는 1전시실은 미술관의 높은 층고를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박공지붕 형태를 잘 드러낸다. 휴먼 스케일을 넘어선 이곳은 시간과 공간이 규정되지 않은 확장된 장소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절로 압도 되는 공간 속에서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생각과 영감까지 무한히 확장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이어지는 전시실에서는 뮤지엄한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방 수장고를 감상할 수 있다. 미술관의 역할은 전시뿐만 아니라 소장품 수집과 작품의 보존 및 연구까지 포괄한다. 이런 이유로 한미사진미술관이 지난 20년간 수집한 2만여 점에 달하는 사진 소장품의 보존을 위해 국내 최초로 저온 수장고와 냉장 수장고를 구축했다. “우리 미술관 소장품 중에는 빈티지 사진이 많아요. 역사적 가치가 큰 작품들이지만 대개 이미 수명이 지나버렸죠. 그렇지만 지금 상태로라도 최대한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사진에 최적화된 설비를 갖췄습니다. 15℃에 상대습도 35%의 저온 수장고에서는 150년을, 5℃에 상대습도 35%의 냉장 수장고 에서는 500년 이상의 수명이 보장돼요.” 현재 전시 중인 작품으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사진을 도입한 황철이 촬영한 1880년대 사진부터 고종의 초상 사진, 흥선대원군의 초상 사진 원본이 있다. 교과서나 미디어에서 누구나 한 번쯤 봤을 법한 익숙한 사진들이다.
실제로 이들 사진은 실온에서는 전시될 수 없다. 빛과 온도, 습도에 예민해서 쉽게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귀중한 작품을 수장고 문을 걸어 잠그고 냉장고 안에서만 유폐시킬 수는 없는 노릇. 뮤지엄한미는 저온 수장고의 한쪽 벽을 유리로 개방해 전시장과 연결된 개방 수장고를 만들었다. 이처럼 개방 수장고는 일반 대중의 시선이 역사적인 작품에 가까이 닿을 수 있게 하려는 뮤지엄한미의 상징적인 전시 장치일 것이다.
지하 1층 멀티홀은 공간의 목적이나 사용을 규정하지 않은 열린 광장으로 기능한다. 영상과 사운드를 수용하는 공간으로 대형 화면으로 사용할 수 있는 7m 높이의 전시 벽과 콘서트홀에 뒤지지 않는 음향 설비를 갖췄다. 공연과 음악회, 아티스트 토크, 영화 상영 등 어떠한 형태의 프로그램도 수행할 수 있다. 2층은 다목적 공간으로 구성했다. 자연광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천장을 오픈하고 외관은 목재 루버를 박공 형태로 마감했다. 내부는 볼트 구조체 양식으로 장식해 천장에 있는 갖가지 복잡다단한 선이 조형적으로 교차하도록 유도했다.
“점심이 지나 해가 뉘엿뉘엿 질 즈음, 빛과 그림자의 향연이 펼쳐져요. 휘황찬란한 패턴이 온 벽과 바닥을 화려하게 채색하죠. 이 공간에 가만 앉아 해가 완전히 넘어갈 때까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의 흐름만 보고 있어도 마음이 평온해져요. 민현식 건축가는 여기를 빛의 태피스트리로 물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뮤지엄한미는 미술관 하면 떠오르는 화이트 큐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끊임없이 관람객과 반응하며 소통하는 하나의 유기체와 같다. 오는 4월 16일까지 열리는 뮤지엄한미 삼청 개관전 <한국사진사 인사이드 아웃, 1929~1982>에서 전시된 작품 역시 미술관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사진은 시간을 기록하고, 시간은 쉼 없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졌다. 역사의 한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눈 앞에 자르르 펼쳐지고, 관람객은 시간 여행하듯 직접 작품 앞을 걸어다니며 그 흐름을 짚어나간다. 역사의 장면과 과거의 기록, 어린 나의 기억과 지나간 날의 추억이 여전히 살아 숨 쉬는 뮤지엄한미는 그런 시간이 모인 소중한 보물 상자가 아닐까.
뮤지엄한미를 설계한 건축가 민현식은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한국 현대 건축의 선구자 김수근과 원도시 건축 연구소의 윤승증 문하에서 건축을 수련하고 실무를 익혔다. 1992년 민현식 건축연구소 기오헌 寄傲軒을 설립하여 독자적인 건축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의 전통사상과 전통건축에서 도출한 ‘비움의 구축’이란 독창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건축적 실천에 몰두했고, 공간대상 건축상과 김수근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