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에 걸친 가족의 추억이 곳곳에 서려 있는 오래된 집을 새롭게 단장한 비마이게스트 김아린 대표. 그의 집은 진귀한 예술품과 이국의 낯선 물건들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카비네 드 큐리오지테’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10여 채의 단독주택이 늘어서 있다. 30여 년 전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던 열 명의 건축가가 모여 같은 평형대의 각기 다른 모습의 주택을 기획해 조성한 골목이다. 시간이 흘러 아담했던 정원의 나무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준공 당시의 모습과는 다른 파사드를 지닌 집도 있지만 동네에서 느껴지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만큼은 예전과 그대로다. 굵직한 브랜드들을 브랜딩하며 올해로 19주년을 맞이한 비마이게스트의 김아린 대표는 이 동네에 산 적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이곳을 잘 아는 이였다.
“이 집은 건축가 유춘수 선생님이 지었어요. 저희 시부모님께서 매매하시고 지금까지 30여 년을 사셨죠. 남편도 20대부터 결혼 전까지 이곳에서 함께 생활했고요. 실은 이 집 마당에서 저희가 약혼식을 올렸어요. 생각해보니 아들 돌잔치도 여기서 했네요.”
약 670㎡에 달하는 넓은 대지에 지은 2층짜리 주택은 중정과 뒷마당, 지하 공간, 1층과 2층 사이 중간층인 메자닌까지 시부모님이 살기에는 다소 큰 평수와 마당을 품고 있어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김아린 대표는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정자동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아들의 스쿨버스 등 교육과 편의 시설이 밀집된 중심가의 인프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이 주말에는 보통 강원도에 내려가 계시기도 하고 여행을 많이 다니시는데, 언제까지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할 수 있겠냐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저희도 아들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기도 했고, 나무가 좀 울창한 집으로 이사하려고 알아보던 중이었어요. 당시 남편의 소원이 아침에 새소리가 들리는 집에서 눈을 뜨는 거였거든요(웃음). 서로의 니즈가 잘 맞아서 집을 바꾸면 어떻겠냐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평소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시간 보내기를 좋아하는 김아린 대표에게도 이는 거절하기 힘든 달콤한 제안이었다.
집을 서로 바꾸는 과정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두 집 모두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대수선하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 먼저 시부모님의 짐과 가구를 김아린 대표의 집으로 옮기고 공사를 진행한 뒤, 또다시 모든 짐을 이곳으로 옮겨 나머지 한 집의 공사를 마무리했다. 함께 살아야만 했던 그 기간 동안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시부모님이 오래 사시면서 느낀 이 집의 장단점을 상세하게 정리한 ‘Happy Home List’를 주셨어요. 예를 들면 이곳은 습기가 많아서 꼭 창문을 내야 한다든지, 이곳은 여름에 너무 덥기 때문에 꼭 빛을 막아야 한다든지, 겨울에는 이곳을, 비가 많이 오면 이쪽을 유심히 살펴야 한다, 집을 가장 잘 아는 정원사 리스트 등 세세한 팁으로 가득했어요. 보통 새집으로 이사하면 그런 것은 살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것들이잖아요. 감사하게도 그런 귀중한 정보를 너무 쉽게 얻은 거죠.” 공사는 계획부터 마무리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각 층의 구조는 물론 바닥과 벽, 창호까지 전부 바꾸는 대공사였기 때문이다.
공사는 주거 인테리어뿐 아니라 동화책 작가로도 활동하는 송혜승 실장에게 의뢰했다. 그와는 오랜 친분이 있는 사이로, 이전 집부터 친구들의 집까지 부탁할 만큼 두터운 신뢰를 쌓아왔다. 패션과 음식, 와인을 사랑하는 김 대표의 라이프스타일을 잘 알고 있는 덕분에 공간 구획이 한층 수월하게 진행됐다. 가장 큰 변화의 공간은 1층. 먼저 벽으로 가로막혀 있던 주방과 다이닝룸을 하나로 만들어 탁 트인 공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가장 먼저 이 대리석을 골랐어요. 토탈 마블에 갔다가 아보카투스라는 이름의 진한 초록색 돌에 반해버린 거예요. 주방 벽과 아일랜드 상판으로 사용했는데, 집 구조가 독특하기도 하고 주방 쪽에 애매한 둔각의 벽이 있어서 시공하는 데 많은 애를 먹었어요.”
다이닝 공간과 거실을 구획하는 벽에는 약 2.6m에 달하는 이배 작가의 작품을 걸기 위해 천장을 깎아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테라스를 향해 끝까지 열리도록 설계한 9m의 거실 창은 다가올 가을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 1층과 2층 사이에 난 메자닌은 아들을 위한 방으로 꾸미고, 기다란 복도와 미니 주방이 자리했던 2층은 큼직하게 터 안방으로 만들었다. 그는 특히 외적인 부분보다는 기능적인 부분에 더 많이 신경을 썼는데, 단열이 뛰어난 창호를 선택하는 것은 물론, 뜨겁게 달궈지는 돔 형태의 천장마다 실링팬을 달아 공기 순환을 원활하게 만들었다. 방치됐던 구름다리도 새롭게 손봐 안방과 아들 방 사이를 쉽게 오갈 수 있도록 했다(반려견 리오가 누구보다 이 다리를 즐겨 건넌다).
“이사하고 나서 무엇보다 작품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어서 좋아요. 이전 집에서는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그냥 하나둘 모아만 뒀었거든요. 저희 어머니인 양주혜 작가와 이배 작가 작품도 곳곳에 걸었고, 안방에는 김희원 작가의 초기작을, 아들 방에는 자코메티의 드로잉을 걸어줬어요.”
전반적인 공간의 무드를 잡기 위해서 그가 가진 가구와 작품들을 먼저 파악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했다. 프랑스 문학자이자 번역가인 아버지, 1세대 설치 미술가인 어머니, 한국 현대 여성 시인 1세대에 속하는 외할머니까지. 프랑스 남부 엑상프로방스 지역에서 나고 자란 김아린 대표의 취향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체화된 것이 대부분이다.
“빈티지한 것을 좋아하긴 하는데, 너무 거친 것은 어렵더라고요. 톤으로 보자면 프렌치까지는 못 가고 벨지안 빈티지 정도랄까요? 빈센트 반 듀이센이나 악셀 베르보르트가 추구하는 스타일처럼 약간은 러프하면서도 톤 다운된 무드가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어요. 리넨을 툭 던져만 놓아도 멋스러운 그런 무드요.”
이사 후 가장 먼저 구매를 결정한 몰테니앤씨의 피로스카포 Piroscafo 장은 루카메다와 알도 로시가 1991년 배의 모양을 본떠 살로네 델 모빌레에서 발표한 디자인이다. 장 안에는 아버지가 번역한 알베르 카뮈의 전집부터 장안요의 찻사발과 주병, 외할머니의 시집, 가족여행을 엮은 사진집 등 귀중한 물건을 하나둘 채워 넣었다. 장식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구는 이전에 쓰던 것을 그대로 옮겨와 배치했다. 가구 외에도 집 안 곳곳 김현성, 임정주, 황형신, 김윤환, 이원우 등 갤러리를 방불케 할 만큼 다양한 국내 작가들의 작품이 놓여 있는데, 특히 김현성 작가는 이사 기념으로 현관 등을 만들어 선물할 만큼 막역한 사이다.
“비마이게스트에서 주로 작업하는 상업 공간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철학이나 비전이 명확하게 정돈되어있어요. 공간이 고객과 커뮤니케이션하는 툴로 기능한다면 집은 꼭 그럴 수가 없잖아요.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해야 살기 편한지, 어떻게 살 것인지를 고민해야 했어요. 이번 집 프로젝트 덕분에 저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이사한 뒤 김아린 대표의 삶에는 한층 여유가 생겼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내려 테라스에 앉아 푸르른 자연을 감상하는 시간이 더해진 것. 마당에서 맨발로 축구하며 새로운 집을 누구보다 ‘잘’ 즐기고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먼 미래에 이 집을 물려줄 상상도 조심스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