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연출과 스타일링, 전시를 기획하는 뷰로 드 끌로디아와 공예가의 기물을 우리의 언어로 다시 만들어 소개하는 뷰로 파피에. 비슷한 듯 다른 이 두 브랜드를 이끄는 스타일리스트 문지윤은 새로운 둥지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확장해 나가는 중이다.
아버지가 선물한 변호사의 책장. 문지윤 실장은 매일 이곳을 오가며 기물을 탐구하는 시간을 보낸다. 왼쪽을 채운 흑자 기물은 모두 소사요 김진완 작가의 작품.
2019년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일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항상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를 부담스럽게 하는 프레임이나 미학적 의식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의식은 물론 무의식 속에서조차 아름답고 ‘보기 좋은 것’에 천착하는 스타일리스트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가족의 품을 떠나 매일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 리빙 스타일리스트 문지윤 실장도 그중 하나. 경기도 외곽에서 전원생활을 꿈꿨던 그가 강북 산자락의 85㎡ 남짓한 아파트에 자리 잡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강남에서 나고 자라 한평생을 살았어요. 작업실도 집과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해 15년 동안 논현역과 신사역 사이만 왔다 갔다 했죠. 주 생활 반경이 걸어서 20분 내였어요(웃음).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은 2~3년 전부터였던 것 같아요. 부모님 집이 아파트였던지라 자연과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인생의 챕터를 바꿔보고 싶었달까요. 주변에 집 짓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땅도 찾아봤어요. 그런데 막상 집을 짓는다는 게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더라고요. 아무래도 그동안의 시간에 대해 보상심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직접 제작한 티 테이블 위에 놓인 화기는 김규태 작가의 작품. 구름 모양의 핑크색과 오렌지색유리 아트워크는 일본 후쿠시 하루카 Fukushi Haruka 작가의 작품.
디자인이에프 박소현 실장에게 부탁해 제작한
리넨 커튼과 침구가 침실을 한층 안락하게 만든다.
삶의 터전을 옮기자는 결심을 하자 스스로의 생활 전반을 되돌아보는 시간이 자연스레 주어졌다. 프랑스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 한국에서 혼자 살아본 적도 없는 데다 단순히 공간을 연출하고 꾸미는 일을 했다는 것만으로 모든 과정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차츰 받아들였다. 예상치 못했던 펜데믹 기간과 천정부지로 솟아오른 건축 자재비, 인건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단은 한번에 너무 많은 점프를 하지 말고 한 단계 한 단계씩 충분한 시간을 들이기로 마음먹었다.
부엌 한쪽에 캐비닛을 배치해 자주 사용하는 기물들을 넣었다. 빈티지 바실리 체어는 프랑스에서 친구가 선물해준 것. 벽에 걸린 작품은 모두 고지영 작가의 작품.
먼저 강남이 아닌 곳을 찾아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아파트만큼은 피하고 싶어 독특한 형태의 주택부터 샅샅이 찾았다. 중개사를 따라 별 기대 없이 온 한 아파트에서 지난했던 여정이 잠시 멈췄다. 거실 창을 가득 메운 초록빛 나무와 숲, 전광판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던 강남의 아파트에서는 단 한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갈 집이라는 생각에 구조는 크게 손대지 않았다. 벽지를 깔끔하게 바르고 문 손잡이를 바꾼 게 전부다. 직업의 특성상 얼마든지 쉽게 손볼 수 있었지만 부러 그대로 두었다. 늘 기호에 맞게 바꿔버리는 버릇을 집에서만큼은 내려놓고 싶었다.
“이전에는 이렇게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 직업병이 생겼어요. 무언가 시각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계속 신경이 가는 거죠. 한번은 식당에 갔는데 무의식적으로 선반 위치를 바꾸고 기물을 재배치하고 있더라고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거나, 새로 바꾸는 것에 몸이 빠르게 반응하는데 주어진 공간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자연스러움을 찾는 능력이 퇴화된 것 같았어요. 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어떡하지? 천장을 막아버릴까? 싱크대 문짝을 바꿔버릴까? 계속 전전긍긍했어요. 막상 공간이 생겼지만 그 안에서 물건을 이용해 저만의 공간을 꾸미는 경험은 없었던 거죠.”
다양한 작가들의 차 도구를 보관해둔 장.
이사하면서 새로 구매한 것이라곤 가전과 제작한 침대가 전부다. 그 외에는 모두 작업실과 집에서 사용하던 가구와 소품을 그대로 옮겨와 하나, 둘 자리를 잡았다. 새집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설지 않은 공간이 만들어진 이유. 집에 놀러 온 지인들로부터 여기서 몇 년을 산 사람 같다는 평을 들었을 정도다. 먼저 거실에는 다이닝 겸 업무를 볼 수 있는 긴 테이블과 의자, 데이베드, 캐비닛 등을 배치했다.
“현장 작업을 위해 만들었던 것이 대부분이지만 언젠가는 제 공간에서 쓸 생각으로 디자인해왔어요. 거실에 배치한 가구는 의자를 제외하고 모두 제작한 거예요. 가구 제작 관련 일을 하는 동생 덕분에 원하는 수종과 느낌으로 어렵지 않게 제작할 수 있었어요.” 테이블 앞뒤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장비가 눈에 띄는데, 평소 따스하고 자연스러운 소리의 연주나 보컬을 좋아하는 문지윤 실장의 취향을 잘 아는 친구가 구성해준 것. 독일 그룬딕 사의 빈티지 튜너와 앰프, 턴테이블, 프로악 사의 북셸프 스피커 등을 추천받아 배치하고, 별도로 소장하고 있던 케프 사의 R5 톨보이 스피커 등을 가져와 함께 두었다.
돌인지, 쇠인지, 철인지 모를 물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소사요 김진완 작가의 무유 흑자 기물들.
안방이라 할 수 있는 가장 큰 방은 다양한 소품과 기물로 채운 분더캄머를 방불케 한다. 한쪽 벽면에는 30년 넘게 가구 사업을 하신 아버지가 선물한 변호사의 책장(Lawyers Bookcase, 유리문으로 여닫을 수 있는 디자인)을 배치한 뒤 여러 작가의 작품과 책, 소품을 올렸다. 매일 이곳을 오가며 기물의 형태와 색, 비례를 자연스럽게 탐구하는 시간을 보낸다.
“방 한가운데 검은 원탁을 두고 차실로 생각하고 있어요. 다양한 소지와 유약을 입은 차 도구도 수집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곁에 두고 틈틈이 써보면서 찻자리의 자유로운 운동을 즐기고자 해요. 새로운 기물을 개발하고 전시, 연출, 판매 기획을 할 때도 직접 매일 만져보고 사용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어요. 대신 작품이나 기물이 일상을 압도하거나 모시듯 살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죠. 단정하고 다정하게 생활을 북돋우는 사물과 함께 지내는 곳이 저의 집이길 바라는 것처럼요. 이사하면서 불필요한 가구나 집을 꾸미기 위해 새 제품을 들이지 않고, 최대한 가지고 있던 것들의 자리를 찾아주고자 했던 것도 그런 맥락이에요.”
창 너머로 푸른 숲이 펼쳐지는 거실 모습. 하루종일 볕이 따스하게 들어온다.
직선적인 비례와 미감이
느껴지는 장 프루베의 가구를 특히 좋아한다.
방 가운데 원형 테이블을 배치해 차실처럼 꾸민 안방.
늘 수많은 물건과 소품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 스타일리스트라도 유독 좋아하는 기물이 하나씩은 있다. 문지윤 실장에게는 차 도구를 비롯한 도자 그릇이 대표적.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소사요 김진완 작가의 기물만큼 그의 마음을 동하게 만든 것은 없었다. 늘 스스로를 절차탁마하는 작가의 심성을 비롯, 흑자 차 도구가 지닌 단단한 생김새에 한눈에 반해버린 뒤 기물의 설계와 쓰임을 알고 싶어 차를 본격적으로 공부했을 정도다. 지식을 훑고 습득하기보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고자 자세를 갖춰 발을 내딛는 의미에 더 가까웠다고 말하는 그. 집 안 곳곳에 걸려 있는 고지영 작가의 크고 작은 회화도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품고 싶은 마음의 결과다.
바닥에 놓인 달항아리와 매병은 모두 소사요 김진완 작가, 도자 소반은 윤세호 작가, 매병 뒤에 놓인 그림은 고지영 작가, 벽에 걸린 그림은 김승규 작가의 작품.
“일과 삶의 괴리가 있었던 시기가 있어요. 밖에서는 항상 아름답고 좋은 기물을 다루는데, 막상 제 삶이 너무 바쁘니 주변을 돌보지 못했던 거죠.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 보니 제가 말하고 표현하는 것이 점점 가짜 같고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마음이 가는 것들에 더 집중하고 줄여 나갔어요. 그제서야 좋아하는 것들이 점차 선명해진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으로 채운 새 공간에서 아침을 맞이한 지도 이제 한 달. 그는 창 너머 불어오는 바람과 들려오는 소리처럼 아주 작은 것이 일상의 단면을 바꿔놓았다고 말한다. 언젠가 자신을 꼭 닮은 집을 짓겠다는 목표의 마침표를 찍게 될 긴 여정의 서막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