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인플루언서 수리의 파리 아파트
아트와 패션 월드를 종횡무진 누비며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산하는 수리. 그녀의 파리 아파트는 예술을 향한 정체성과 비전을 품은 살롱이다.
수리를 처음 본 건 몇 해 전 바젤에서였다. 아트 바젤 VIP 프리뷰 데이, 드레스와 하이힐 차림으로 참석한 그녀는 갤러리스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파리플러스, 아트 바젤 홍콩 등 세계의 주요 아트 이벤트에서 마주쳤다. 지난해 파리 프티팔레에서 열린 우고 론디노네 전시 오프닝 파티에서 다국적 컬렉터들이 그녀에게 어떤 작품이 좋은지, 어떤 작품을 구입했는지 묻고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지켜보았다 (이후 그녀는 국제갤러리 파리지사의 디렉터로 지사 오픈을 돕고 총괄했다).
최근에는 몰테니앤씨의 글로벌 앰버서더로 촬영한 영상이 공개됐고, 이 모든 상황과 동시에 그녀의 인스타그램에는 밀라노와 파리 패션위크의 프런트로와 패션 하우스의 프라이빗 파티 풍경들이 올라왔다. 많은 독자는 이쯤 되면 그녀의 정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 독립 큐레이터, 패션 인플루언서, DJ 등 광폭의 활동 반경에 한 이탈리아 매체에서는 그녀를 일컬어 ‘르네상스 우먼’이라고 칭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다양한 패션 행사와 파티를 마치고 긴 비행시간을 거쳐 파리 8구에 위치한 아파트로 이제 막 도착한 그녀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예술에 있어 언제나 가장 중요한 도시인 파리와 지금 가장 핫한 아트 시티로 등극한 서울, 이 두 도시를 오가며 많은 시간을 비행 이동으로 할애하는 그녀에게 집이란 어떤 의미일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10대 초반부터 정말 다양한 아파트에서 살아봤어요. 파리에서만 다섯번째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까요. 어머니가 인테리어 디자이너여서 어릴 때부터 공사 현장이 익숙한 환경에서 자라 공간의 본질을 보는 눈이 생긴 것 같아요. 저만의 아파트를 고를 때는 언제나 첫인상이 중요하고요. 지난여름 이사한 이곳은 처음부터 폭 안기는 느낌을 받았다고 할까요.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채광에 거실과 다이닝룸 그리고 개인공간이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구조를 보자마자 영감이 떠올랐어요. 20세기 거트루트 스타인 파리 살롱이 그러했듯 문화적 배경과 분야, 세대 등의 경계없이 모여 예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살롱 역할이 중요했거든요.”
예술 기획 플랫폼인 메종수리 Maison Suri를 창업하고 끊임없이 흥미로운 일들을 벌이는 그녀에게 파리 아파트는 자신의 예술적 지향점을 품고 표현하는 공간이다. 지난해 프리즈 서울 위크 동안 빌라드파넬에서 연 <MIND:FULL:NESS> 전시에 이어, 올해 아트 바젤 파리플러스 위크를 기념해 그녀는 이 아파트에서 ‘Abundance(풍요)’라는 테마의 기획전을 열었다. 이들은 수리 자신이 먼저 좋아하고 팔로우하면서 작가들과 소통하고 함께 공감대를 형성해 섭외한 작가들이다. 여성적 직관, 영적인 다산 그리고 대안적인 형태의 지혜의 샘을 두드리고 탐구하는 동시대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풍부함’의 다면적인 개념을 파헤치고자 하는 의미다. 아이가나갈리 Aigana Gali, 권죽희, 이유, 윤여동 등 세계 여러 도시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 그녀의 아름다운 아파트 공간과 어우러졌다.
“시대상을 반영하는 플랫폼과 미디어가 너무 많은 시대잖아요. 그속에서 정작 자신의 일상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과 방향을 찾기란 쉽지 않고요.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공간이 아닌 개인의 삶이 스민 공간과 예술을 접목해 어떻게 예술을 향유하고 소비할 수 있는지 제시하고 싶었어요.”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오후, 거실 한쪽 벽을 채운 아이가나 갈리의 작품 아래로 창을 통해 쏟아진 햇빛이 아른거린다.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가 자라난 초원의 영적인 에너지와 본질적으로 연결된 추상적 이미지가 파리의 전형적인 몰딩 장식과 부딪히고 공명하고 있었다. 자신이 시간을 보내는 공간을 어떤 예술로 채우느냐가 수집가의 취향을 대변한다. 갈수록 혼돈스럽고 위기감이 높아지는 시대상 속에서 잠시라도 마음의 풍요를 채울 수 있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닌 작품들을 좋아한다고했다.
수리에 대해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녀는 정작 자신의 배경에 대해 크게 떠벌리거나 부러 강조하지 않는 편이다. 그녀는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미술사 학사 과정을 마치고 파리의 아메리칸 유니버시티 오브 파리 American University of Paris와 소르본 대학, 뉴욕의 소더비 인스티튜트를 거친 학구적 배경과 더불어 예술에 대한 애정을 겸비한 컬렉터임에도 말이다. 그녀의 관심과 열정은 그런 피상적인 것보다는 자신의 비전을 어떻게 하면 구체화시키고 발전시킬 것인가로 향하고 있다.
“한 레이블이나 카테고리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요. 우리가 무엇을 입고, 먹고, 보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고, 어떤 것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그 총합이 우리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거잖아요. 저는 서로 다른 분야의 것들을 예술의 내러티브로 엮어 발생되는 에너지를 통해 삶을 본질적으로 아름답고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더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