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드넓은 초원 위에 자리한 어느 부부의 주택은 디자이너 오메르 아벨의 실험 정신이 빗어낸 결과다.
혁신적인 비전을 지닌 건축가가 이뤄낸 결과를 먼 발치에서라도 바라보는 일은 늘 즐겁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조명 브랜드로 잘 알려진 보치 Bocci의 설립자이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오메르 아벨 Omer Arbel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오메르 아벨 오피스’를 통해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를 선보인다. 그런 그가 최근 10여 년의 기나긴 여정 끝에 대형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밴쿠버 남부의 건초 농장 지형과 산림 환경을 적극 활용해 주택을 설계한 것이다. 보치 조명을 포함해 자신의 프로젝트를 연대순으로 기록해 이름 짓는 그의 철학에 따라 이 프로젝트 이름을 ‘75.9’로 명명했다.
836㎡의 드넓은 초원에 고고학 유적처럼 우아하게 존재하고 있는 이 주택은 조 Joe와 키라 헤일리 Keira Hailey 부부가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한 주택을 오메르 아벨에게 의뢰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들의 요청은 간단했어요. 가족과 함께 살 주택을 지어달라는 것. 몇 해 전 실험적인 설계를 시도했던 23.2 프로젝트를 본 클라이언트가 지난 프로젝트를 능가할 만한 독특한 주택을 지어달라고 의뢰했어요.” 아벨이 말했다.
얼핏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땅속 깊이 뿌리 내린 거대한 나무가 집 안을 통과하고 있는 모습 같기도 하고, 묵직한 코끼리 다리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 프로젝트에 사용된 기술은 방사형으로 배열된 경량 합판 리브(고딕 건축에 주로 사용된 독특한 지붕 구조)를 둘러싼 직물에 콘크리트를 부어 만든 방법이다. 그 결과, 뒤집어둔 나팔 형태의 대형 구조물이 집 안의 중심을 잡고 있으며 구조적 흥미로움이 느껴지는 드라마틱한 공간이 연출되었다.
“직물에 강한 저항력을 가하지 않도록 콘크리트를 매우 천천히 붓는 과정이 필요했어요. 그로 인해 효율적인 구조 라인을 따르는 유연한 형태가 되어 기존 거푸집 작업에서 발생되는 폐기물이나 다운사이클링뿐 아니라 필요한 콘크리트와 강철, 불필요한 노동력까지도 감소시킬 수 있었어요.” 아벨이 75.9 프로젝트의 가장 큰 축을 담당하고 있는 콘크리트 구조물에 대해 말했다.
내부 벽면을 둘러싸고 있는 우드 프레임도 주목해야 한다. 서로 다른 높이로 타공된 우드 기둥은 아벨이 ‘릴리패드 Lillypads’라 이름 붙였는데, 이는 주변 자연 환경을 품는 화분과 같은 역할을 한다. “마치 자연으로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 원래부터 자리 잡고 있던 유적을 발견한 것처럼 자연과 하나 된 듯한 모습을 구현하고 싶었어요. ‘자연’이라는 개념은 점점 더 인공적으로 변해가고 있어요. 이른바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조차 이미 인간에 인해 기후 변화가 시작되었기에 그 배후에는 분명 인간이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런 세상에서 저는 ‘자연’을 초현실주의의 기회와 경이로움의 순간을 창조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요.”
75.9는 물질에 대한 실험 결과로 오메르 아벨이 이제껏 선보인 프로젝트 중에서도 가장 야심 찬 작품이다. 자연 경관을 품은 이 주택은 현대적인 동시에 시대를 초월한 기념비적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