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포의 한 공장을 개조해 완성한 디자이너 김빈의 새로운 작업실. 수많은 디자인 서적과 샘플로 가득한 그녀의 공간 맞은편에는 직원들을 위한 공간이 조성돼 있다. 디자이너가 삭막한 공장 지대에 들어섬과 동시에 이곳에 새로운 문화가 생겨날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을 재해석해 현대적인 디자인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즐겨 하는 디자이너 김빈이 직접 디자인한 한지 단청 브로치를 가슴에 달고 카메라 앞에 섰다.
누구나 이정표 하나 없는 길을 가고 있지만 디자이너 김빈은 출발점부터 인생의 좌표가 뚜렷했다. 홍익대학교 산업미술학과를 졸업한 후 곧바로 LG전자에 입사한 그녀는 이때부터 창업을 꿈꿨고 디자인 회사인 빈 컴퍼니를 창업한 후에는 한국 전통의 아름다움에 새롭게 눈떠 전통을 재해석해 일상에 디자인을 접목하는 작업을 다져가고 있다. “2005년 LG전자에 입사해 8년 동안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연구소, 디자인 전략팀, 디자인 경영 그룹 등에서 일했어요. 대학 때부터 개인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했기 때문에 이때 받은 월급은 고스란히 개인 작업에 쓰이곤 했어요. 그 당시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지금의 발판이 되고 있는 것 같아요.” 디자이너 김빈의 개인 활동 교두보가 된 것은 2009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데스티네이션 프로젝트. 뉴욕 현대미술관과 현대카드가 손잡고 한국의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고자 마련한 이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회사 생활 중에 틈틈이 디자인하고 준비해온 드링클립 Drinklip을 선보이며 큰 주목을 받았다. 동그란 구멍이 있는 집게 모양의 드링클립은 책상이나 테이블에 끼우면 음료수를 꼽는 홀더가 된다. 드링클립의 큰 반응에 힘입어 디자이너 김빈은 2011년 퇴사하고 빈 컴퍼니를 세웠다. 그리고 메종&오브제,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런던의 100% 디자인전 등에 드링클립을 출품하며 시장을 넓혀갔다. 그 결과 현재 드링클립은 뉴욕 현대미술관의 아트 숍을 비롯해 파리의 메르시, 일본의 도큐핸즈 등 세계 곳곳의 라이프스타일 편집 숍에 입점해 있다.
1 까다로운 작업의 하나인 한지 그리팅 카드를 만들고 있는 디자이너 김빈. 2 단청 다용도 실리콘 매트. 컵 받침으로 사용하기에 알맞은 크기다. 3 단청을 모티프로 한 볼 세트. 한창 샘플 작업 중이다. 4 최고 품질의 한지를 사용하는 ‘한지 바스켓 오브제’와 장판지를 이용해 만든 ‘JPJ 이지 바스켓’. 마른 식재료나 일상 소품을 수납하는 등 활용도가 높은 제품이다.
남색 톤인 팬톤의 에보니 컬러를 메인으로 칠해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가 나는 디자이너 김빈의 작업실. 내부에 식물을 많이 들여 자연과 함께하는 즐거움도 잊지 않았다.
디자이너 김빈은 산업디자인 중에서도 자동차를 전공했다. 하지만 자동차는 결과물을 내기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잘 만든 디자인으로 대중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싶었던 그녀는 자신의 작업에 매진하는 길을 택했다. 현재 빈 컴퍼니는 산하에 드링클립과 미츠, 라이프 발랜서의 3개 브랜드를 지닌 제법 큰 몸집으로 성장했다.
2012년 디자이너 김빈은 빈 컴퍼니 산하에 미츠 Meeets라는 또 다른 브랜드를 론칭했다. 미츠는 우리 전통을 재해석해 현대 디자인에 접목시킨 생활용품을 선보이는 브랜드다.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디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딱히 정의할 말을 찾기 힘들었어요. 이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문득 우리가 지금까지 한국 고유의 것을 잊고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창의적인 시선을 통해 우리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는 미츠라는 브랜드를 고안했습니다.” 디자이너 김빈은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회에서 주최한 2011년 한지 상품을 개발하는 디자인 토너먼트에 참여하면서 전주의 한지 장인을 만났다. 닥나무를 삶아 껍질을 벗기고 줄기 속의 티를 제거하는 등 수많은 수작업을 거쳐 탄생한 한지의 매력에 흠뻑 빠진 그녀는 한지로 만든 바스켓을 비롯해 브로치, 노트, 카드 등의 한지 상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한지 작업을 시작으로 전통을 모티프로 한 다양한 작품을 시도했어요. 단청을 모티프로 한 실리콘 컵 받침을 만들고 장판지를 소재로 다양한 사무 용품을 만들었죠. 옛것을 현대의 디자인으로 표현해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지만 상당히 흥미로워요. 가장 즐겁게 하는 작업이죠.” 수많은 디자인이 난무하는 오늘날, 우리의 전통문화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미감을 지닌 디자인의 원천이 된다. 드링클립으로 승승장구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 켠에서 더 나은 디자인에 대해 고민했던 그녀는 그 해답을 우리의 뿌리에서 찾은 것이다.
강 위를 떠다니는 배를 연상시키는 한지 바스켓 오브제.
장판지를 조명 갓으로 활용한 조명과 단청을 모티프로 한 볼 세트는 모두 샘플 작업품이다.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책과 인터넷을 찾아 하나 둘씩 하다 보니 셰프 못지않은 요리 실력을 지니게 됐다. 디자이너 김빈은 요즘 작업실 주방에서 한식을 배우고 있다.
디자이너 김빈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될 김포 작업실의 입구.
디자이너 김빈은 최근 작업실을 여의도에서 김포로 옮겼다. 빈 컴퍼니의 몸집이 커지고 작업량이 많아지다 보니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오랜만에 작업 공간을 바꿔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녀가 선택한 곳은 김포 대곶면 석정리의 한적한 공장 지대. 널따란 공장의 한 켠을 짜임새 있게 개조해 그녀의 새로운 안식처로 삼았다. “도시에서는 작업실을 자주 옮겨야 했어요. 이제는 한자리에 오랫동안 자리 잡아 브랜드를 제대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디자이너 김빈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먼저 천장고가 높아 탁 트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입구를 중심으로 미팅이 주로 이루어지는 중앙의 라운지 공간은 천창을 시원하게 틔워놓고 양옆의 공간을 2층으로 만든 메자닌 구조이다. 공장 특유의 밝은 회색 벽면은 팬톤의 에보니 컬러인 남색으로 칠해 차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다. 직원들의 사무실과 디자이너 김빈의 공간으로 나뉘는 2층은 깔끔한 디자인의 나무 책상과 테이블, 컴퓨터가 있으며 천장 가까이 가로로 길게 난 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이 시간에 따라 그림자를 달리하며 벽면과 바닥에 색다른 무늬를 보여준다. “이곳에 와서 가장 좋은 건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다는 거예요. 햇살을 마음껏 쐴 수 있고 무엇보다 공기가 좋아요. 뒷산은 종종 산책이나 운동을 나가기에도 좋죠.” 1층의 양쪽 공간은 도면과 각종 소재, 샘플로 가득한 작업실과 주방이 마련되어 있다. 한식과 양식을 두루 섭렵한 요리 실력을 지닌 디자이너 김빈은 이번 작업실을 준비하면서 주방을 꾸미는 일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직접 요리를 해먹고 작업실을 찾아오는 손님에게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주변의 공장 노동자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새로운 노동 환경을 제공하려는 의도도 담겨 있다.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 단지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 말고 주변 사람들과 뭔가 의미 있는 소통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했어요. 마땅히 쉴 공간이 없는 공장 지대에 우리가 새로운 휴식의 활로를 마련해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좀 더 자리를 잡으면 주방을 그들을 위한 카페로 운영해볼까도 고민 중이에요.” 디자이너 김빈은 자신을 경직된 틀 안에 가두기를 거부한다. 창의적인 시선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고 누구와도 경계 없는 소통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새로운 계획과 포부를 안고 입성한 새로운 작업실에서 그녀는 디자이너라는 정체성에 안주하지 않는 작업을 세상에 펼쳐 보이기 위해 또 다른 초석을 하나 둘씩 견고하게 다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