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잔디밭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는모습. 2 독일 건축가 마르쿠스 하인스도르프의 파빌리온. 3 친환경 건축물인 테크스타일 하우스.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푸아티에역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두 시간 가량 달려 도착하니 역 앞에 환영 팻말을 든 소녀가 다시 셔틀버스로 안내했다. ‘도멘 드 부아부셰 Domaine de boisbochet’로 가는 길은 차로 한 시간을 더 가야 했다. 여섯 가구 정도만 살고 있다는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마을 레삭 Lessac 안에 자리한 부아부셰. 매년 여름이면 이 외딴 동네에서 열리는 건축+디자인 워크숍을 위해 캄파나 형제, 알바로 시자, 필립 니그로, 하이메 아욘 등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디자이너들과 일반 참가자들이 모여든다.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의 관장이었던 알렉산더 폰 페게작 Alexander von Vegesack이 부아부셰 건축+디자인 워크숍을 연 지도 25년째. 디자이너들과 디자이너를 꿈꾸는 예비 디자이너들은 그간 이 작은 동네에서 무엇을 얻었고 또 남겼을까. 부아부셰로 가는 여정과 기대감은 흡사 해리 포터가 초대장 하나를 들고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향하는 듯했다.
6월부터 9월까지 열리는 워크숍은 매주 두세 팀의 디자이너가 강사로 참여해 수업을 진행한다. 내가 방문한 주에는 폴란드 디자인 그룹인 스튜디오 리갈릿 Studio Rygalik과 일본 건축가 고 하세가와 Go hasegawa의 워크숍이 열렸다. 이번 주에는 스페인, 대만, 브라질 등 총 16개국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했는데 영국의 디자인 웹진 ‘디즌 Dezeen’에서 수상을 했다는 당찬 스페인 학생부터 레바논에서 온 건축과 교수와 학생들, 한국 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을 통해 방문한 현업 작가, 전단지를 보고 호기심에 신청했다는 대만의 피아니스트, 유럽 여행을 하다 듣고 싶은 워크숍 일정에 맞춰 왔다는 이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동경하던 디자이너들을 만나고 싶다는 팬심으로 오는 중년 아주머니들도 있어요. 강사로 오는 디자이너들도 휴가라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오죠. 그러니 여기 있는 동안 그냥 즐기면 돼요. 멋진 풍경과 건물들을 보면서 말이에요.” 오랜 유학 생활을 하며 참가자, 스태프 신분으로 부아부셰에 드나든 지 10년째라는 김수민 씨가 일러줬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디자인에 대한 열망으로 모였건만 치열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보다 나이, 국적을 초월해 우리가 여기 함께 모여 있다는 것에 그저 즐거워했다.
올해 부아부셰 디자인 워크숍의 전체 주제는 ‘디자인과 커뮤니티’. 내가 들었던 수업은 토멕 Tomek와 고시아 Gosia 두 사람으로 구성된 부부 디자이너인 스튜디오 리갈릭의 ‘테이블, 우드&푸드’였다. 작년에 이어 부아부셰 워크숍에 두 번째 방문이라는 그들은 미리 봐둔 현장으로 참가자들을 이끌었고 몇 번의 아이디어 회의를 거쳐 이곳에 둥근 벤치를 제작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각국의 음식을 융합한 퓨전식 핑거 푸드를 만들어 다 같이 즐기며 금요일 저녁에 마련된 워크숍 프레젠테이션을 대신했다. 결과보다는 과정에 집중하고 어떤 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주목하는 스튜디오 리갈릿의 색깔이 여실히 담긴 수업이었다. 다른 수업인 고 하세가와의 워크숍에서는 ‘마이크로 아키텍처 인 네이처 Micro Architecture in nature’를 주제로 26명의 참가자들이 빙 둘러앉은 크기만큼 나무토막을 심어 작은 파빌리온을 완성했다. 만드는 수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몇 주 전에는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안무가인 요난 보캐르 Jonah Bokaer가 참가자들과 무용을 했는데, 부아부셰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인간의 몸짓이 어우러진 퍼포먼스를 펼쳤다. 디자인 워크숍에서 무용이라니! 이 수업은 부아부셰에 오래 머물렀던 스태프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였다.
부아부셰는 다양한 워크숍을 골라 듣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지만 그 외에 많은 볼거리가 있다. 19세기에 지어진 부아부셰 성에서는 해마다 전시가 열리는데 이번에는 알렉산더 폰 페게작의 컬렉션으로 마련한 ‘아 타블레 A Table’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하엘 토넷의 초창기 작품부터 론 아라드, 장 푸르베, 찰스 임스, 그 외 작가 미상의 빈티지 테이블까지 대형 미술관의 기획 전시에서나 만나볼 법한 엄청난 작품들을 프라이빗한 분위기에서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다. 또 부아부셰 곳곳에 있는 건축물을 둘러보는 것도 묘미다. 시게루 반이 유럽에 처음 지었다는 종이 파빌리온, 나고야에 있던 1860년대 민가를 그대로 옮겨와 재조립한 재퍼니즈 하우스 Japanese house, 건축가 마르쿠스 하인스도르프 markus heinsdorff의 파빌리온, 친환경 에너지 기술을 집약한 테크스타일 하우스 Techstyle house 등 자연, 역사, 첨단 기술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건축물을 모두 음미할 수 있다. “워크숍을 듣지 않아도 건축 투어만 따로 신청할 수 있어요. 또 최근에는 에어비앤비를 통해 몇몇 건물에서 숙박을 할 수 있도록 마련했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요.” 수민 씨가 설명했다.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이 건물들에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면 디자인은 허울로 남았을 거다. 사람들이 직접 살고 또 활용하면서 디자인의 가치를 몸소 느끼도록 한 부아부셰 디자인 워크숍 운영 측의 깊은 사려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일주일간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부아부셰를 떠나던 토요일, 이곳에서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떠올리니 ‘디자인은 경계 없음’이라는 말로 치환할 수 있었다. 동과 서, 전공과 비전공자가 어우러지고 서로의 분야를 초월하는 그곳은 누구에게나 열린 환영의 성이었다.
1 참가자들이 생활하는 건물. 2 함께 식사하는 모습.
1 페게작의 컬렉션으로 꾸민 방. 2 레스토랑 ‘밀 하우스’. 3 고 하세가와의 건축 워크숍 현장.
1 콜롬비아의 유명 건축가 시몬 벨레즈 Simon Velez가 2001년에 지은 뱀부 파빌리온. 2 단정한 분위기의 재퍼니즈 하우스 내부. 3 재퍼니즈 하우스는 1980년대 일본의 민가를 이곳까지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INTERVIEW
끝나지 않은 그의 이야기
부아부셰 건축+디자인 워크숍의 수장, 알렉산더 폰 페게작과 대화를 나눴다.
부아부셰 건축+디자인 워크숍이 25주년을 맞게 된 소감은 어떤가? 이곳에 인공 호수를 만들고 오래된 건물을 보수하는 것을 시작으로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선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래 걸렸지만, 돌이켜보면 너무 뿌듯하다. 짓고 다시 고쳐 나가고 차근차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내가 평생에 걸쳐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당신은 여기 방문하는 어떤 디자이너보다도 열정적인 것 같다. 그저 젊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줘서 좋을 따름이다. 해가 지날수록 꾸준히 오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데 참가자에서 부아부셰의 스태프로,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되어 부아부셰에 강사로 오는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점점 더 가족이 되어간다는 느낌이 든다.
그간 진행된 워크숍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미켈레 데 루키의 수업이다. 그는 워크숍 프로그램이 완성되지 않았던 초창기부터 꾸준히 강사로 참여했는데, 어느 해에는 참가자들이 마지막 날에 미켈레 데 루키 부부를 감동시키기 위해 아침을 직접 차려준 적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과 디자이너가 함께 호흡을 잘 맞춰 나가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사실 많은 이들이 한 그룹으로 만나서 아이디어를 나누고 결과물을 완성하기까지 5일은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어떻게 만들어 나가느냐 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고, 나는 워크숍 프로그램을 선정할 때 이를 기준으로 삼는다.
당신이 유명한 디자인 가구 컬렉터인 만큼 물건에 대한 애착이 상당할 거라고 예상했는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은 것 같다. 제품과 사람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어떤 물건을 만들면 거기서 끝이 아니라 다른 이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얼마든지 다시 만들 수 있다. 물건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는 거다. 적어도 부아부셰에서 사물의 역할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만나 각자가 지닌 문제 해결 방법을 배우고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충실하기를 바란다.
동양의 전통적인 건축물부터 첨단 기술이 집약된 건물까지 다양한데, 어떤 기준에서 부아부셰에 새로운 건축물을 짓는가? 모두 내 의도는 아니었고 우연치 않게 결정된 거다. (웃음) 2009년에 옮겨온 재퍼니즈 하우스는 일본의 산업 디자이너 토시유키 키타 Toshiyuki kita가 소개해준 일본 고민가협회 (The Reserch Society om Traditional Japanese Homes)에서 선물로 준 것이다. 일본은 외풍이 많아서 적은 재료로 집을 짓는데 이렇게 완성도 있게 만든 걸 보고 놀랐고 일본 목수들을 이곳에 데리고 와서 다시 조립하게 되었다. 나는 부아부셰에 무언가를 지을 때 어떤 제한도 두고 싶지 않다. 역사적인 건축물도 좋지만 상상력을 발휘해서 만든 학생들의 작업도 적극 환영한다.
부아부셰 디자인 워크숍이 어떤 역할을 하기 바라는가? 다양한 사람이 만나는 이곳에서 참가자들이 열린 태도를 갖게 되고 더 넓은 관점을 배우기를 희망한다.
1 스튜디오 리갈릿의 디자이너 고이사와 참가자들이 함께 파티 음식을 만들었다. 2 나무 밑동을 중심으로 만든 둥근 벤치에서 다 같이 모여 파티를 즐겼다.
1 참가자들이 낸 아이디어로 회의를 하는 모습. 2 나무 밑동을 중심으로 만든 둥근 벤치에서 다 같이 모여 파티를 즐겼다. 3 스튜디오 리갈릿의 토멕의 지도 아래 벤치를 제작했다.
INTERVIEW
균형을 위하여
폴란드 디자인 그룹 스튜디오 리갈릭,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들이 궁금했다.
한국의 <메종> 독자들에게 스튜디오 리갈릭에 대해 소개해달라. 스튜디오 리갈릿는 2006년부터 시작했는데 아내인 고시아하고는 2012년부터 함께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모로소 Moroso, 폴란드 가구 회사 컴폴티 Comforty, 이케아 등과 협업했고 가구뿐 아니라 음식과 연관된 다수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부아부셰는 두 번째 방문인데 어떤 점에 매력을 느껴서 다시 오게 되었나? 자연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좋았고 학생들과 만나는 것도 즐거웠다. 현재 폴란드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디자인 전공 학생들이면 어떤 아이디어를 이야기할지 어느 정도 예상된다. 하지만 이곳 참가자들은 너무 다양해서 예측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이 재미있었고 나에게도 도전이었다.
이번 워크숍 주제를 ‘테이블, 푸드&우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작년 수업의 주제였던 ‘컴포트, 푸드&우드’에서 거기서 연장된 것이다. 가구는 토멕, 음식은 고시아 담당인데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주목하는 디자인 테마에서 비롯되었다. 또 올해 부아부셰 성에서 열린 전시 주제가 ‘아 타블레 A Table’이기도 했고 이번 워크숍의 전체 주제인 ‘디자인과 커뮤니티’를 고려해 그룹 전체가 모일 수 있는 테이블을 선택했다.
수업 때 절대 실현 불가능한 아주 엉뚱한 아이디어도 칭찬, 격려하고 수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원래 작업할 때도 그러는 편인가? 브레인스토밍은 유일하게 사고를 열어둘 수 있는 때이니 어떤 아이디어든지 수용해야 한다. 구상 단계에서부터 비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엉뚱한 아이디어라도 같은 속성끼리 분류해서 살펴본 다음 합치거나 뺄 것은 없는지 결정한다. 그러면서 실현 가능한 방향으로 조율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방식이다.
한국에서는 폴란드 디자인이 생소한 편인데 간략하게 설명 부탁한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재료와 공장을 다 갖춘 나라가 폴란드다. 비트라, 이케아의 나무 제품은 거의 대부분 폴란드 공장에서 만든다고 보면 된다. 10년 사이 젊은 디자이너들이 많아졌는데 이들의 독특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기술도 갖췄다. 특히 헌 타이어처럼 원래 있던 재료를 다시 깎고 만들어서 재활용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딸과 함께 부아부셰에 방문해서 세 식구가 도란도란 지내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다. 가족이 생기고 난 후 디자인을 마주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나? 가족이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일이 삶이 된 것이다. 혼자 다녔을 때는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느껴도 거기서 그치고 말았는데 가족들과 여행을 다니면서 언제든지 디자인에 대해 의논하고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