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사람의 손만을 거쳐 한 벌의 의상을 완성하는 맞춤복의 세계는 시간이 보다 정교하고 느리게 흐른다. 시장의 흐름에 맞춰 발 빠르게 등장하는 기성복이 아닌 수고와 노력이 깃든 맞춤복을 디자인하는 정윤민, 정유진 자매의 아틀리에는 아날로그적 미학으로 가득했다.
1 빨간색부터 검은색까지 온갖 색을 두루 섭렵한 드레스가 고고한 정윤민의 공간. 2 정유진은 옷의 음영과 소재, 패턴과 실루엣이 차별화되는 의상을 만들고자 한다. 3,4 좋은 소재가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의 옷을 만든다. 자매는 시간만 나면 좋은 소재를 찾아 시장조사를 나가곤 한다.
국립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인 김지영의 드레스를 피팅하고 있는 정윤민. 정윤민은 약 1년 전부터 사진작가 김근우와 함께 협업해오고 있다. ‘불가항력, 죽음’이라는 주제 아래 발레 작품들을 선정, 본인은 물론 사진작가, 발레리나, 미디어 아티스트, 헤어&메이크업 아티스트 각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작품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이 검은색 드레스는 발레 <라바야데르>의 니키아의 사후 작품으로 정윤민이 김지영을 위해 만들었다.
5,6 사무 공간 곳곳에는 디자인 스케치가 붙여 있다. 작업하는 주제는 다르지만 자매는 때때로 서로의 의견을 구하며 함께 고민하고 연구한다. 7 화이트와 핑크로 꾸민 사무 공간. 바쁘게 일하다가 이곳에 잠시 들러 재충전의 시간을 갖곤 한다. 8 앤티크를 사랑하는 정윤민은 어릴 적 모아온 앤티크 소품과 가구로 아틀리에를 채웠다.
패션의 대가 이브 생 로랑은 다큐멘터리 영화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를 통해 “패션은 삶의 풍요를 위한 미적 환영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오트 쿠튀르, 이른바 숭고한 장인정신이 깃든 맞춤복의 세계에서 패션이 선사하는 미적 환영의 정점을 감상할 수 있다. 디자인부터 바느질까지 하나하나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하기 때문에 수공예적인 섬세한 예술 감성 또한 느낄 수 있다. 옷이라기보다 작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맞춤복은 기나긴 제작 과정을 거친다. 디자인과 소재, 패턴, 실루엣 등 한 사람을 위해 많은 것이 고려되고, 수차례의 수정을 거쳐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한 벌의 의상이 완성된다. 폭주하는 매일처럼 순식간에 유행이 바뀌는 요즘은 하루가 다르게 수많은 기성복이 세상에 등장한다. 하지만 계산된 선택과 시장의 상황을 반영한 의상이 아니라 조금은 느리고 다르더라도 옷을 입는 한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한 의상을 입는 것을 꿈꾸는 사람이라면 맞춤복에 대한 열망은 당연히 커질 수밖에 없다.
온갖 브랜드가 난무하는 가로수길의 메인 거리를 벗어난 세로수길, 수수한 한 건물의 6층에 위치한 패션 디자이너 정윤민, 정유진 자매의 아틀리에는 일반과는 조금은 다른 의상을 제작하는 곳이다. 둘 다 맞춤복을 주로 하고, 언니인 정윤민은 클레리아 정 Clelia Chung이라는 이름으로 드레스를, 동생 정유진은 라 실루엣 드 유제니 La Silhouette de Eugenny라는 이름으로 현대 의상을 선보인다. 정윤민, 정유진 자매는 부모님이 패션 디자이너인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집 안 곳곳에서 디자인 스케치와 각종 원단을 마주하게 되는 일이 일상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패션 디자이너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특히 정윤민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며 한때 음악인을 꿈꿨다. “어렸을 때 막연히 원단상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어떤 디자인을 표현하고 싶은데 그걸 소화해내는 원단이 없어서 안타까워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여러 번 봤었거든요. 원단에 대한 관심이 자연스럽게 디자인에 대한 관심으로 자랐고, 지금은 주로 무대에 서는 음악가나 특별한 순간을 위한 드레스를 만들고 있어요.” 정윤민은 성악을 전공한 덕에 누구보다 음악가들을 잘 이해한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 아름답길 원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윤민은 아름다움을 넘어 각자의 표정, 몸짓 하나하나에 최적화된 의상을 만들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소질이 많았던 동생 정유진은 대학에서 복식디자인을 전공하는 등 패션계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해왔다. 졸업 후에는 어머니를 도와 패션 디자인 일을 해오다 얼마 전부터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소재와 컬러, 디자인이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내는 실루엣이 옷 입는 사람 개개인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의상을 만드는 것이 모토. 본인 스스로도 마음에 들 때까지 수차례의 수정을 거쳐가며 깐깐하고 세심하게 옷을 만든다.
맞춤복이라는 조금은 다른 영역을 선택한 정윤민, 정유진 자매는 오늘날 패션의 새로운 가치와 시작을 열어가고 있다.
앤티크 가구와 피팅을 위한 전신 거울, 드라마틱한 색감의 드레스가 색다른 미적 경험을 선사하는 정윤민의 공간.
작년 말 새롭게 조성한 세로수길의 아틀리에는 정윤민, 정유진 자매가 함께 사용하는 곳이다. 처음엔 사방이 뻥 뚫린 100평 남짓한 공간이었는데 중간 중간 벽을 세워 자매는 각자를 위한 공간을 비롯해 원단실, 샘플실 등 옷을 개발하는 공간 등으로 세분화했다.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장 먼저 화려한 색채의 옷들이 벽을 따라 늘어서 있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다. 세상의 온갖 빨간색을 모아놓은 듯한 붉은 톤의 드레스들, 잭슨 폴락의 그림에서 튀어나왔을 법한 과감한 패턴의 투피스 등 색색의 컬러 팔레트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자매는 총천연색 옷으로 가득한 각자의 공간에서 옷을 맞춤 제작하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하고 치수를 재는 등 다양한 작업을 한다. 일에 집중하느라 각자의 공간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많지만 때로는 서로의 공간을 찾아 조언을 해주는 등 관심과 배려를 적절히 유지한다. 정유진의 공간 너머에는 아담한 사무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하얀색 레이스 천을 깔아놓은 커다란 책상과 창가를 따라 설치해둔 파스텔 핑크 컬러의 펜던트 조명 그리고 정윤민이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앤티크 도자 소품과 스카비오사, 아스틸베 같은 유러피언풍의 꽃을 꽂아놓은 화병 등 자매의 취향을 반영한 이곳에서 그들은 때때로 디자인을 스케치하고 휴식을 취한다. 자매의 공간을 지나면 색색의 실패가 한쪽 벽면에 무늬마냥 걸려 있고, 패턴과 한창 작업 중인 옷 조각들이 겹겹이 쌓여 있는 개발실이 나온다. “이곳에서 가장 신경 쓴 곳이 개발실이에요. 우리는 샘플 제작부터 옷의 완성까지 모든 것을 이 개발실을 통해 진행해요. 패턴사, 재봉사, 재단사 등 이곳에 계신 모든 분은 어머니 때부터 함께해온 분들이고 워낙 다들 베테랑이라 작업 노하우가 상당하세요. 저희는 이분들이 보다 쾌적하고 편안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많은 것을 배려하고자 노력했어요.” 정유진의 설명이다.
9,11,12 자매가 지인들을 초청해 아틀리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다. 섬세한 무늬가 들어간 패브릭으로 테이블을 감싸고 앤티크 실버웨어와 촛대, 글라스 등을 놓아 테이블 스타일링을 완성했다. 10 정윤민의 드레스 작품을 모티프로 한 케이크를 보고 모두가 탄성을 자아냈다.
아틀리에에서 특이한 점은 테라스 공간이 두 곳이나 있다는 점이다. 자매는 테라스를 각각 전혀 다른 스타일로 꾸몄는데, 한쪽은 블랙&화이트로, 다른 한쪽은 핑크를 메인 컬러로 한다. 블랙&화이트 공간에는 작은 바를 설치해 샴페인이나 칵테일 등을 마시기 좋게 만들었고, 핑크 컬러의 공간에는 몸을 누일 수 있는 커다란 벤치를 놓아 여유 있게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그들은 때때로 이 두 공간을 오가며 작은 파티를 열곤 한다. 클래식 음악과 발레 등 예술계 지인들이 워낙 많아 종종 모여 음악을 듣거나 친목의 시간을 가진다. “무대에 서는 분들이 아니고서야 아직 맞춤복을 낯설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저희는 맞춤복이 예술가들과 기성세대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또 단순히 한 사람을 위한 특별한 옷을 제작하는 것만도 아니죠. 누구나 그 미적 가치를 누리고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맞춤복을 향유하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트렌드를 따라 급히 가기보다 조금은 천천히 가도 온갖 노력의 결정체를 옷으로 빚어낼 때 오늘의 패션은 그 가치를 높이게 된다. 맞춤복이라는 일반 패션과는 다른 영역을 선택한 정윤민, 정유진 자매는 부모로부터 대물림된 솜씨를 각자의 개성과 감각으로 견고하게 다져가며 패션의 또 다른 시대와 가치를 열어가고 있다.
13 라 실루엣 드 유제니의 상큼한 노란색 의상을 입은 플루티스트 차민경. 14 서울시향의 김수영 바이올리니스트와 김대일 비올리스트. 15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비올리스트 이한나와 정유진, 정윤민 자매. 이날 파티에 참석한 이들은 오랜 시간 우정을 다져온 음악인들이다. 16 파티에서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왼쪽부터 첼리스트 김대준 · 정유진, 플루티스트 차민경 · 정윤민, 비올리스트 김대일 · 김한나, 바이올리니스트 김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