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달재 개인전 <정중동 靜中動 | 동중정 動中靜 Movement in Tranquility, Tranquility in Movement>
when 5월 20일(월)~6월 8일(토)까지
where 표갤러리 본관
tel 02-543-7337
화가의 운명
거대한 산이었던 조부의 그늘 아래 처음 붓을 든 것은 여섯 살 때였다. 한국화가 허달재의 삶과 그림은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였다.
그림만으로 그 그림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나 화가의 인생과 그림이 하나의 뿌리를 두고 엮여 있어서 어느 한쪽만으로는 도저히 다른 한쪽을 이해할 수 없을 때도 간혹 있다. 직헌 허달재 화백이 그런 경우다. 흔히 한국 전통 기법과 형식을 바탕에 둔 회화를 한국화로 통칭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는 여러 갈래의 논의와 화풍이 혼재한다. 조선 후기 중국에서 유입돼 고유의 방식으로 진화한 한국의 남종화 南宗畵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데 주력하기보다 작가의 생각과 느낌에 중점을 두고 그리는 화풍이다. 선비의 그림이라 할 수 있는 문인화와 사실상 중첩된다. 그는 추사 김정희에서 이어지는 남종화의 대가 의재 허백련의 장손이다. 당대를 이끄는 예술가였던 할아버지는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있는 것부터 고역이었을 여섯 살 어린 손자에게 붓을 잡게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과 인생의 깨달음을 그림에 담는 남종화의 계승자가 다음 세대를 이어갈 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그림 그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보는 게 반이라고 하니까. 혈통 그런 건 모르겠고, 남들보다 많이 보면서 자랐으니 아무래도 배운 것이 있겠죠. 전통적으로 서양이 몸과 이성에 중심을 둔다면, 동양은 정신과 지혜에 중점을 두는 경향이 있어요. 어느 쪽이 나쁜 건 아니고 누구나 양쪽의 입장을 다 가지고 있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게 중요합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하늘이 준 내 성품에 할아버지라는 사람과 인연을 맺어서 다듬어진 생각을 가지게 된 사람이에요.”
화가 이전에 사람으로서 정체성을 세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할아버지는 곧은 마음으로 살라는 뜻을 담아 ‘직헌 直軒’이란 호를 지어줬다. 조부이자 스승인 의재 선생이 작고한 후 화가로서의 삶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스승의 작품 세계에 어떻게하면 더 가까워질까 고민하던 시기를 지나자, 당연하게도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필연의 고통이 찾아왔다. 뉴욕과 파리, 북경 등을 오가며 새로운 기법과 소재, 주제에 대한 실험을 거듭했던 즈음이다. 그 무렵에 열었던 전시가 <KARMA>전이었다. 영광스러운 가업은 어느 순간 말 그대로 ‘업 業’이 되어 있었다.
“수묵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아파트나 자동차 같은 것도 그려봤어요. 추상 작업도 해보고, 한지 대신 캔버스에 그리기도 했죠. 그리고 다시 전통으로, 사군자로 돌아왔어요. 나도 모르게 나는 이미 변해 있는데 내가 굳이 변하려고 애를 쓴 거였구나 깨닫게 된 거예요.”
명실상부 남종화의 계승자이자 신남종화의 개척자로 불리고 있는 허달재의 개인전 <정중동 靜中動 | 동중정 動中靜 Movement in Tranquility, Tranquility in Movement>이 서촌으로 이전한 표갤러리의 첫 번째 전시로 열리고 있다. 정과 동,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등 대립되는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지점을 찾아온 작가의 기나긴 여정이 담긴 이번 전시는 10여 년 만에 열리는 오랜만의 개인전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왔다고 하지만, 당연하게도 처음과 같지 않다.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색채, 형태, 재료의 사용 등 작가의 생과 함께 익어가고 있는 작품의 변화는 충분히 숙성된 예술 세계의 틀 안에서 새롭고 분방한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내 그림의 부족함을 알고, 그래서 부끄럽고 겸손하게 되면 작가가 성장하게 됩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을 때 내 그림을 본 사람이 차분하고 편안해진다면, 그게 내 그림의 값어치겠죠.”
여섯 살의 소년은 일흔의 나이를 앞두고 있지만, 아직도 매일 작업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불편하다. 매일 생각하고 공력을 들이지 않으면 여전한 그림을 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전통이 살아 있으면서도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매화 시리즈는 꾸준하게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과 그림을 정리할 시점이 오면, 지금까지 자신이 칠한 색을 거둬내고 수묵화로 돌아갈 생각이다. 아직 찬란한 색으로 가득한 그의 작품들은 6월 8일까지 표갤러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CREDIT
포토그래퍼
김도원
writer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