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욕망, 갈등, 경쟁, 차별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자유는 환상인 줄 알았다. 노은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랬다. 그녀는 자유롭다. 자연과 붓이 이끄는 곳에 자유가 있었다.
고희를 넘긴 작가의 웃음이 아이처럼 맑다. 아이의 마음처럼 노은님의 작품에는 아무 차별과 편견이 없다.
퍼붓듯 쏟아지는 소나기를 뚫고 그녀가 갤러리에 나타났다. 땡땡이 패턴으로 가득한 옷차림의 이 자그마한 여자는 재독 작가 노은님이다. 그녀는 한국인 최초로 국립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 회화 지도 정교수와 함부르크 국제 여름 아카데미 학장으로 20여 년간 독일 미술 교육 현장을 지켰다.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각지에서 전시 활동을 해왔고 피카소, 마그리트의 작품과 나란히 프랑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기도 했다. 그녀를 몰랐던 사람이라도 함부르크 알토나 성 요한니스 교회가 화재 후 복구 작업을 할 때 외국인이자 비종교인으로 480장이 넘는 스테인드글라스에 새로 그림을 그릴 작가로 선정되었다는 것만으로도 노은님의 작가적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독일에 산다. 그곳에 그녀의 미술이 있다. 어린 나이에 일을 찾아 떠난 독일에서 하루 일과가 끝나고 일기를 쓰듯, 친구를 만나듯 그림을 그렸다. 숨길 수 있는 재능이 아니었다. 우연히 그녀의 그림을 본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림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국립 함부르크 미술대학에 입학했고, 바우하우스에서 바실리 칸딘스키와 파울 클레를 사사한 독일 표현주의의 거장인 스승 한스 티만 Hans Thiemann과의 만남은 노은님의 예술적 잠재력이 폭발하는 계기가 된다. 그녀의 작품에는 논리와 계산이 없다. 붓이 가는 대로 종이와 캔버스에 그려내는 단순하고 거친 선이 모여서 물고기, 새, 개구리 같은 자연의 존재를 이룬다. 그녀의 자연은 멀리서 바라보는 풍경도, 미지의 원시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질서이자 우주이고, 거기에는 점 하나에 불과한 인간도 포함된다.
생각, Thought, 2019, Acrylic on Canvas, 91×73cm.
배고픈 동물, Hungry Animal, 1986, Mixed Media on Paper, 132.5×168.5cm.
“나는 맨날 같은 걸 그려요. 자연 속에 사니까 내가 보고 느끼는 건 다 그 안에 있어요.
지나가다 돌멩이 하나를 들춰봐도 그 안에 온갖 것이 다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어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다 생명이에요.
이 세상 돌아가는 게 태어나서 잠깐 살다가 사라진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인간은 달에도 가는데 한쪽에서는 굶는 사람들이 있고, 없는 나라일수록 무기를 만들고 사들이는 게 나는 안타깝고 모순되는 일인 것 같아요.
모든 존재는 공생하는 거고 공평한 건데, 나는 근본적으로는 다 똑같다고 느껴요.”
어느 봄날, One Spring Day, 2019, Mixed Media on Canvas, 161×225cm.
불 속에서, In the Fire, 1982, Mixed Media on Paper, 119×179cm.
그녀는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 두 전시 공간에서 열리는 개인전 <힘과 시>를 위해 서울에 왔다. 자연과 생명을 주제로 한 1980년대~90년대의 대형 회화, 노은님의 예술관을 다룬 바바라 쿠젠베르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테라코타 조각과 신작 회화 등으로 구성되는 대형 전시다. 전시를 아우르는 주제는 역시 자연이다. “아버지가 동물을 좋아하셨어요. 우리는 9남매였는데 애도 많고, 동물도 많아서 유치원 같기도 하고 동물원 같기도 해서 늘 놀러 오는 동네 애들이 많았죠. 우리 집에서는 하지 말라는 게 별로 없어서 자유롭게 자랐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생명 있는 것들에 차별을 안 뒀어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똑같아요. 남의 집에 갔는데 꽃나무에 물을 안 줘서 빼빼 마르고 있으면 주인한테 화분은 다리도 없는데 어떻게 물을 찾아가느냐고 미운 소리를 해요. 한 번도 사람이 다른 생명보다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독일 남서부 헤센주 미헬슈타트에 있는 집 근처의 깊은 숲에는 여우와 멧돼지, 사슴 같은 동물들이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 앞 개울에 사는 숭어와 가재에게 먹이를 주고 점 하나 찍는다는 생각으로 붓을 든다. 그리겠다는 각오 같은 건 없다. 붓이 이끄는 대로 그리다 내키지 않으면 만다. 돈도 많이 벌었지만 역마살 따라 여행 다니며 쓰는 것 말고는 주변과 나누며 산다. 지금 사는 집은 문화재급의 고성이다. 지인들은 그 돈이면 좋은 집을 살 거라고 만류했지만, 그녀는 엄청난 렌트비를 내고 성을 고치고 살다 35년 후에는 국가에 반납하는 조건으로 지금 집에 들어왔다. ‘그림으로 살면서 이런 문화재 하나 고쳐주고 좀 살다 가면 되지’ 생각해서다. 모든 일에 거스름도 없고, 억지도 없다.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그냥 살아버린다. 자유는 우주라는 위대한 질서 안에서 세상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티끌에 불과한 나 자신을 인정하는 순간 찾아오는 것인 모양이다. 노은님은 자유롭다. 인간은 자연 속의 작은 점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그녀의 작품 안에서 평화와 위안,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이유다. 그녀에게 행복한지 물었다. “행복할 것도 없고, 불행할 것도 없어요. 배탈이 나서 화장실에 너무 가고 싶은데 못 가면 불행한 거고, 화장실에 들어가 앉으면 행복하죠. 그런데 막상 화장실을 나오면 별게 아니거든. 감정은 고정된 게 아니라 그렇게 왔다 갔다 하는 거니까요(웃음).”
생명의 시초, In the Beginning(Am Anfang), 1984, Mixed Media on Paper, 258×203cm.
뛰는 동물, Jumping Animal(Springendes Tier), 1984, Mixed Media on Paper, 230×526cm.
오히려 한국의 대중에게 노은님의 작품 세계가 덜 알려진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녀는 매우 탁월한 미술적 성취를 이룬 한국 작가다.
노은님 개인전 <힘과 시>
when 7월 3일~8월 4일(가나아트 한남), 7월 19일~8월 18일(가나아트센터)
where 가나아트센터, 가나아트 한남
tel 가나아트센터 02-720-1020 가나아트 한남 02-395-5005
* 대규모로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가나아트센터와 가나아트 한남, 두 전시 공간에서 이뤄진다.
노은님은 회화에 국한하지 않고 설치미술, 퍼포먼스, 테라코타 조각 등 다양한 작업 방식을 병행한다. 가나아트 한남에서는 회화 작품과 테라코타 조각이 함께 소개된다.
노은님의 작품에서 자연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요소인 4대 원소, 즉 공기, 물, 불, 흙의 변주로 완성되는 세계다. 천진하게 느껴지는 동물의 이미지와 강렬한 색감에는 대가의 미술 세계의 원천을 이루는 정신이 녹아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의 이해를 강제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 멋대로 이해하고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