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이곳저곳을 발길 닿는 대로 가보는 짧은 여행을 좋아한다. 말문이 막히는 일도 없고, 큰돈을 쓸 일도 없고, 몸도 마음도 가볍게 떠나는 여정. 강원도 강릉은 그런 여행의 기쁨에 눈뜨게 한 곳이자 가장 빈번하게 찾는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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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호 마을에서 본 석양
보통 차를 타고 갈 때는 내비게이션에 하시동 풍호 마을을 찍고 간다. 강릉에서도 비교적 한적한 이 마을 안쪽으로 굽이 길을 천천히 따라가면 이름도 인적도 없는 해변을 불현듯 만나게 된다. 군사 시설과 안인사구 생태경관보존 지역이라는 두 가지 이유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 예전에는 모래사장을 따라 철책이 있고 개방 시간도 제한적이었던 이 바다와 한참 눈인사를 나누는 것으로 강릉을 찾은 목적의 절반은 채워진다. 인근의 유일한 관광 시설인 메이플비치 호텔은 위치가 참 좋아서 강릉을 갈 때마다 즐겨 찾는 숙소다. 이곳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오죽헌과 허균 · 허난설헌 생가가 있다. 오죽헌이 대대적인 조성사업을 통해 율곡 이이의 업적을 과시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허균 · 허난설헌 생가는 한적한 고택으로 남아 있다. 시대의 반항아였던 허균과 불운한 천재의 전형과도 같은 허난설헌의 삶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관의 손길을 덜 받은 이곳이 훨씬 초연하고 아름답다는 점은 씁쓸한 위안이 된다. 그 뒤로 보석 같은 솔숲이 경포호까지 이어진다. 산책을 나온 동네 사람들, 피크닉을 즐기는 어머니들, 팔짱을 끼고 걷는 관광객들이 3천여 그루의 장성한 소나무 사이에 적당한 밀도로 공존하는 광경은 언제 봐도 근사하다. 강릉을 유명하게 만든 커피 한 잔도 빼놓을 수 없다. 주로 해안 길 북쪽으로 달려 보헤미안을 가는데, 인근의 순포 습지는 휴가철에도 인적이 드물고 유독 아름다운 수련이 핀다. 해가 저물면 버드나무 브루어리의 맥주와 엄지네포차의 꼬막비빔밥을 테이크아웃해서 호텔로 돌아온다. 종종 무서우리만큼 가깝게 들리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좋아하는 책을 펼치면 더는 바랄 게 없는 밤을 보낼 수 있다. 이렇게 설렘보다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며, 언제든 돌아가는 마음으로 강릉을 찾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얻는다. 익숙하지만 그리운 강릉은 내가 여행을 통해 발견한 마음의 고향이다. -TWL 대표 김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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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것인 듯 호젓한 안인사구 근처 바닷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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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화와 부들이 무성한 7월의 군포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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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호까지 이어지는 소나무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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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뜨기 직전의 동해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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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브루어리의 미도리세션,
엄지네포차의 꼬막, 매그레 시리즈와 함께하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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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 허난설헌 생가의 고즈넉한 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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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높은 파도가 치고,
아침부터 바다 위로 폭설이 내리던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