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당당히 감독상과 작품상을 거머쥐며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한 봉준호. 그가 차곡히 쌓아왔던 필모그래피를 사심을 담아 찬찬히 들여다봤다.
봉준호 유니버스의 신호탄
<플란다스의 개>
조감독을 벗어나 감독의 모습으로 메가폰을 잡은 첫 장편영화 입봉작 <플란다스의 개>. 시작부터 봉준호는 남달랐다. 유쾌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씁쓸한 봉준호 표 블랙 코미디는 영화 <플란다스의 개>에서부터 그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 사실 이 영화의 개봉 당시 관객 수는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간 강사 겸 집안일을 도맡는 윤주(이성재)와 고졸 출신의 비정규직 경리 현남(배두나)가 좁디좁은 다세대 아파트 내에서 발생한 잇따른 개 실종 사건을 계기로 계속해서 얽히게 되면서 비춰지는 등장인물들의 여러 단면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계층 간의 갈등 구조를 다채롭게 그려내는 봉준호만의 유니버스의 첫 시작을 알렸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치롭다.
페르소나와의 첫 만남
<살인의 추억>
한국 영화계에서 2003년은 가히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올드 보이, 장화 홍련 등의 걸출한 명작이 쏟아져 나온 해였다. 그중 단연 화제에 올랐던 작품은 바로 <살인의 추억>. 장기 미제 사건인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을 모티프로 제작된 이 영화는 그 해 각종 영화상을 모조리 휩쓸 정도로 한국 영화계에 묵직한 한 방을 날렸다. 조감독과 오디션 지원자로 마주한 것이 첫 인연이 되어 같이 영화를 찍게 된 둘은 이후 영화 <괴물>과 <설국 열차> 그리고 <기생충>까지 함께 하며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감독과 페르소나로 거듭났다. 이 영화의 백미를 꼽으라면 바로 ‘봉테일’이라 불릴 만큼 섬세하게 표현된 감독의 디테일이다. 시시각각 숨겨 놓아 찾는 재미가 있는 메타포적 장치들과 긴장감을 놓을 수 없는 장면 전환 그리고 이 영화의 절정이라 불리는 엔딩까지! 명배우와 명감독의 활약이 국산 스릴러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봉준호의 우화
<옥자>
하마를 닮은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돼지를 닮은 듯해 도무지 정체 파악이 안되는 동물을 통해 봉준호는 다시금 묵직한 메시지를 날렸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각자의 목적을 가진 채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 중심에는 옥자가 있다. 그들에게 옥자는 회사에 친환경적 이미지를 부여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미래 식량 문제를 해결할 자원이거나, 동물학자로서의 명성을 위한 실험체 혹은 단체의 더 큰 목적을 위해 이용해야 하는 발판이다. 각기 다르지만 그들 모두는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옥자를 활용하려 한다. 봉준호는 옥자의 존재를 빌려 자본주의 시대 속 인간이 동물을 향해 내비치는 다양한 형태의 탐욕과 나아가 그 탐욕을 실현하기 위해 시도하는 비윤리적인 행위들을 꼬집는다.
서늘한 감각으로 탄생한 극단의 서스펜스
<마더>
봉준호를 국민 감독으로 거듭나게 한 영화가 <괴물>이라면, <마더>는 그가 가진 천재성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캐스팅에서부터 그의 서슬 퍼런 천재성은 빛을 발한다. 한국 드라마 속 전형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배우 김혜자에게 전혀 다른 어머니의 면면을 부여한 것을 보라. 도준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었음에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음을 알게 된 엄마가 비틀린 모성으로 자행하는 대사와 행위들은 이제껏 김혜자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그들의 합의 하이라이트는 오프닝과 엔딩이다. 시작부터 관객을 사로잡는 충격적인 오프닝과 한국 영화사 내에서도 손꼽히는 엔딩 신은 김혜자의 깊이감 있는 연기와 봉준호의 서늘한 감각으로 탄생한 역작과도 같은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