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언제나 ‘쓰기’로 시작한다. 책상에 앉아 처리해야 할 업무를 내리적고, 완료 후에는 하나씩 지워나가며 하루를 보낸다. 건망증 때문에 고생했던 막내 시절부터 시작된 습관이다.
수년간 여러 노트를 거쳤지만 얼마 전부터는 몰스킨 리포터 노트에 정착했다. 무뚝뚝한 검은색 커버에 턱 하니 걸쳐진 고무밴드 하나가 전부지만, 필기감도 좋으며 앙증맞은 크기까지 마음에 든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사실 이 노트에는 업무 뿐 아니라 업무 후하고 싶은 일도 적어 보고 있다. 현대 백화점 치즈 코너에 가서 셰브르 치즈를 산다, 레드텅에 가서 주말에 마실 와인을 고른다,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을 본다 같은 소소한 일들 말이다. 백지 상태의 노트에 가까운 미래를 적으며 현실화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작가의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행복한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여러가지 재미 있는 미래들을 적어주고 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쓰기 시작한 노트도 있다. ‘베어 Bear’라는 애플리케이션인데, 레이아웃이 간결하면서도 유용한 기능이 많아 이런저런 기록용으로 쓴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이 나오면 사진을 찍어 첨부하고 개인적인 느낌을 적는 식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나중에 소중한 추억이 되기에, 중2병에 걸린 마냥 감상적이고 주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다. 노년의 나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 만사가 꿈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때가 오면, 오직 글쓰기로 보존된 것들만이 현실로 남아 있을 가능성을 갖는 것이다.” 얼마 전 읽었던 제임스 설터의 글귀는 이러한 생각에 쐐기를 박아주었다. 쓰는 행위는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가. 시간을 이길 수는 없지만, 작은 기록 하나로 우리는 빛나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붙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