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잠이 들어 애인을 놓친 아리아드네 공주의 반전 스토리다. 크레타 섬의 공주 아리아드네는 적국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를 돕기 위해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미로에 들어갈 때 문설주에 실을 묶고 들어가라는 비책을 알려준다. 테세우스는 미로의 한가운데 살고 있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고 실을 따라 되돌아 나오는 데 성공하고, 뇌물로 바쳐질 뻔했던 고국 사람들을 이끌고 탈출한다. 적국의 왕자를 도운 아리아드네도 테세우스를 따라 길을 나선다. 아테네로 돌아가는 먼 길, 배는 잠시 낙소스 섬에 머무르고, 긴장이 풀린 아리아드네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녀가 눈을 떴을 때 안타깝게도 테세우스 일행은 이미 떠나버린 후였다. 배신한 고국으로 되돌아갈 수도, 자신을 버리고 떠난 왕자를 찾아 가는 것도 아닌 그 섬을 벗어날 배한 척 조차 없는 처지가 된 아리아드네. 그런데 그녀 앞에 섬의 주인 디오니소스가 나타난다. 디오니소스는 마녀 키르케로부터 도망쳐 나오는 길이라 낯선 여인이 자신의 섬에 와있는 것을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고, 깊은 절망감에 빠져있던 아리아드네는 디오니소스가 혹시 자신을 데리러 온 저승사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행히도(?) 둘은 서로한테 반하고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진다. 또 다른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프시케다. 에로스의 아내였던 프시케는 남편을 의심한 죄로 버려지고, 다시 남편을 되찾기 위해 험난한 네 단계의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지옥에 가서 페르세포네의 아름다움의 비결이 담긴 화장품을 받아오라는 마지막 관문마저 성공한 그녀는 이제 남편과 재회할 순간만을 앞두고 있다. 헌데 그 화장품이 무엇일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살짝 열어본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바로 그 속에 담긴 ‘깊은 잠’이 그녀를 감싸버린 것이다. 결국 아름다움의 비결은 깊은 잠이었던 것일까. 다행히 이 모든 과정을 보고 있던 남편 에로스가 안타까이 여겨 잠든 프시케를 깨워 하늘로 올라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는 해피엔딩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잠들기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잠’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시대, 예술 작품에서의 잠은 깨어있지 못하고, 따라서 통제할 수 없는, 인간이 가장 약해지는 순간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성을 중요시하는 시대의 산물이다. 반면, 잠들어 버림으로써 도리어 왕자들의 구원을 받는다는 공주들의 이야기는 잠의 긍정적 측면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수동적인 이미지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잠에 대한 이미지는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잠은 돌연 그 신분이 달라지게 되었다. 꿈과 상상, 무의식의 세계가 발견되면서 잠은 깨어 있는 시간 못지않게 중요해진 것이다. 지금은 건강한 낮을 위해 푹 자는 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식하고 있다. 예술에서의 흐름도 자연히 변화했다. 현대미술가의 작품 속에서 잠은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 잘 잠들 수 있도록 위안을 주는 시간으로 나타난다. 트레이시 에민의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1995)이 대표적이다.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아름다운 여성 작가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은‘잔다’라는 말이 가진 성적인 뉘앙스를 떠올렸을 테지만, 1963~1995라는 설명에서처럼 그녀와 함께 잔 사람들은 어머니, 할머니, 어린 시절의 소꿉친구에서부터 남자친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방대하다.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했던 102명을 소환하며 그들의 이름을 자수로 새겨 넣은 작품은 지금의 내가 이들과의 관계 덕분에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게 만든다. 잠자는 시간이 죽음에 가까운 것이라면,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것은 부활이고 성장인 것이다. 애인과 함께 잔 행복한 순간의 기억을 도심 한복판에 광고처럼 내걸며 유명해진 작가도 있다. 바로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무제’(1991)라는 작품이다.
마치 침구 회사의 광고 사진인가 싶게 거대한 화면에는 두 사람이 이제 막 잠에서 일어난 듯 베개 머리 부분이 푹 꺼져 있고 이불은 흐트러져 있다. 에이즈로 1996년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토레스의 작품은 대개 자전적이다. 그의 연인 로스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경험을 표현하고자 미술관 한구석에 애인의 몸무게와 똑같은 사탕더미를 쌓아놓고 관객들로 하여금 가져가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사진 작품 속 침대에 함께 누웠을 두 사람도 아마토레스와 로스일것이다. 작가는 이 사진도 포스터처럼 인쇄하여 미술관에 쌓아놓고 관객들이 하나씩 가져갈 수 있게 했다. 이 작품에서도 느껴지듯이 오늘날 잠은 재생, 행복 그리고 가장 사적인 영역에 있는 소중한 시간이다. 인테리어도 이러한 인식 전환에 맞게 바뀌고 있다. 예전에 침실이란 옷장과 화장대와 침대가 함께 있는 안방 같은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집에서 가장 작은 방을 침실로 삼아 아무것도 두지 않고 침대만 넣어 방해받지 않는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트렌드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여전히 ‘미라클 모닝’ 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왜 잠에서 깨는 시간조차 대세를 따라야 하는지 안타까움이 앞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쳤던 데카르트도 스웨덴 여왕의 초청을 받아 그녀의 리듬에 맞춰 새벽 강의를 하다 감기에 걸려 53세의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부디 잠을 양보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