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오브 구찌 ©Universal pictures / 페인 앤 글로리 ©Sony pictures
영화는 종합예술이다. 화면 전반에 등장하는 배우의 몸짓과 언어, 구체적인 행위 대신 감정을 수반하는 음악 그리고 영상의 색채나 톤등 하나의 시퀀스를 이루는 개별의 쇼트에는 이토록 많은 예술적인 요소가 촘촘히 짜여 있다. 당연히 영화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배경도 치밀한 기획의 산물이다. 잠시간 영화의 스토리에서 눈을 돌리는 순간, 장면마다 눈을 사로잡는 이색적인 가구와 소품을 요목조목 따져보면 이를 배치한 시대적, 국가적 맥락은 물론 제품과 무드를 배치한 감독의 의도마저 십분 읽어낼 수 있기 때문. 가장 피상적인 방식으로 영화 속 인테리어를 즐기는 것은 마치 숨은 보물을 찾듯 영화에 사용된 다양한 제품과 가구의 정체를 들춰보는 것이다. 최근 개봉 소식을 알렸던 영화 <하우스 오브 구찌(2021)>를 들여다보자. 리들리 스콧이 메가폰을 잡고 레이디 가가와 아담 드라이버가 주연으로 참여한 이 영화는 세계 최정상의 패션 하우스를 이룩한 구찌 일가의 미우라치오 구찌를 살해한 파트리치아 레지아니의 실화를 다루고 있다. 구찌 일가의 막강한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1930년대 건축가 피에로 포르타루피가 디자인한 밀라노의 빌라 네키 캄필리오를 배경으로 시각적인 충만함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1980~90년대 미우라치오와 레지아니가 거주하던 뉴욕의 아파트를 사실적으로 구현했다.
휴먼 보이스 ©Sony pictures / 아메리칸 싸이코 ©Lionsgate
당시보다 현대적이면서도 화려한 글램 룩 스타일이 유행하던 뉴욕 상위 계층의 모습을 반영하기 위해 화이트 톤과 크롬, 벨벳을 소재로 한 가구를 배치했는데, 예리한 눈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내 놀의 플래트너 암체어나 고프레도 레지아니가 디자인한 크롬 램프 등의 가구가 사용 됐음을 잡아낼 수 있었으리라.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작품 <페인 앤 글로리(2019>와 <휴먼 보이스(2020)>에서는 그야말로 황홀경이 펼쳐진다. 감독의 자전적 영화 격인 <페인 앤 글로리>에서는 감독의 페르소나와도 같은 말로 감독의 집이 실제 알모도바르의 집으로 등장해 더욱 눈길이 간다. 가구와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그는 미술감독 앤손 고메즈와 함께 영화를 위해 자신의 집을 세트로 활용했다. 피트 하인 에이크의 테이블에 올려진 에르메스 블루 다이아 컬렉션, 포르나세티의 테이블웨어와 나비 캐비닛은 물론, 까시나의 637 위트레흐트 암체어나 에토레 소트사스의 토템 오브제 등 곳곳에 비치된 페드로의 리빙 아이템을 찾느라 절로 n회차 관람을 자처할 정도. <휴먼 보이스> 또한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는데, 긴 가운을 끌며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틸다 스윈튼의 거처에 집중 하면 감독 특유의 가구를 활용한 컬러팔레트를 만끽 할 수 있다. 주홍색의 놀 소파와 유제프 히에로프스키의 366 메탈 체어, 샤를로트 페리앙의 컬러 유닛 선반과 세바스티안 헤르크너의 황동 테이블까지 다채롭게 전개되는 가구와 소품의 향연은 영화의 줄거리와는 또 다른 층위의 재미를 준다. 물론 단순히 영화 속 가구와 소품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이 영화의 배경을 살펴봐야 하는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폴란드 디자이너 유제프 히에로프스키의 366 메탈 체어.
샤를로트 페리앙의 컬러 유닛 선반. 크기와 유닛이 각기 다른 점이 특징이다.
까시나의 637 위트레흐트 암체어.
영화의 배경은 알고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걸 담아낸다. 방의 온도나 가구와 소품의 전략적인 배치에서 감독이 인물에 부여한 성격과 특성 그리고 공간을 오가는 인물들의 심리를 간접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기도 하다. 이에 대한 전형이 바로 2000년대 개봉한 <아메리칸 싸이코>다. 크리스찬 베일이 연기한 패트릭은 1980년대 등장한 젊은 전문직을 통칭하던 여피족으로 그려진다. 외부적으로 그는 사회적인 성공과 반전과 평등, 차별 금지 등을 외치는 진보적인 의식주의자로 보여지나, 실상은 물질만능주의에서 기반한 우월함과 극렬한 레이시즘, 폭력적인 성향을 지닌 것으로 그려진다. 당연히 사회적인 시선으로부터 그는 자신의 환경을 열렬히 통제 할 필요가 있었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그의 집은 과시적이면서 자기 통제적인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공간이다. 일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백색의 공간에 바르셀로나 체어와 힐하우스체어, ‘B9사이드 테이블 등 간결하면서도 하나의 건축처럼 어떠한 변수 없이 잘 짜인 가구들이 즐비해 있다. 최소한의 생활감도 느껴지지 않고 말끔하게 구획된 집은 사회적인 성공과 교양을 겸비한 이를 연기하는 패트릭의 자기 통제적인 성격을 읽어 낼 수 있게 돕는다.
<하우스 오브 구찌>에 등장한 놀의 플래트너 암체어와 크롬 램프. 당시 화려한 글램 록 스타일의 집과 어울리는 가구다.
놀의 바르셀로나 체어. 주인공의 통제된 본능을 간접적으로 표현한다.
가게 아울렌티와 마르티넬리 루체와의 협업으로 탄생한 피피스트렐로 램프.
에토레 소트사스의 토템 오브제. <페인 앤 글로리>와 <휴먼 보이스> 두 영화 모두에 사용됐다.
이번에는 공간을 통해 두 인물 간의 보이지 않는 갈등과 긴장감을 그려낸 영화를 살펴보자. 2009년 영화 <샤넬과 스트라빈스키>는 혁명과도 같은 예술가의 생애를 살다 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코코 샤넬 간의 미묘한 관계성을 다룬 영화다. 1910년대 후반 격동기를 겪는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한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을 위해 샤넬이 거처를 마련해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당시 자칫 과해 보일 정도로 장식적인 아르데코 스타일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지만, 샤넬은 과감히 장식을 배제하고 블랙과 화이트 톤의 매치와 볼드한 선을 포인트로 한 모던한 저택에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을 들인다. 그러나 운 좋게 쾌적한 집을 구했음에도 그의 아내만큼은 이 공간을 달갑지 않아 한다. 샤넬의 감각과 안목으로 꾸민 집이 그저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기 때문. 그런 그녀는 공간 곳곳에 비치된 가구를 하나둘 자신의 태피스트리로 덮어버린다. 이어 이러한 모습을 샤넬이 보게 되면서 두 인물간의 미묘하게 날선 감정이 그 어떠한 대사 없이 인물의 뒤편에 놓인 공간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샤넬과 스트라빈스키 ©Wild bunch / 프렌치 디스패치 ©Walt Disney Studios Motion Pictures
그런가 하면 영화가 구태여 설명하지 않는 시대, 국가적 맥락을 공간의 구현으로 대신 전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개봉한 웨스 앤더슨의 <프렌치 디스패치(2021)>는 프랑스의 한 가상도시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다양한 시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칼럼처럼 에피소드화되는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된다. 물론, 각 이야기 간의 이음새가 그리 친절한 편은 아니지만, 아담 스톡하우젠이 세트 디자인을 맡아 에피소드마다 확연히 다른 프랑스 도시의 모습과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공간 인테리어가 다시 한번 웨스 앤더슨의 심미안을 인정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 원작의 <위대한 개츠비(2013)>에서는 영화에서 그려진 당시의 시대, 문화적 풍토를 보다 명쾌히 짚어볼 수 있다. 배즈루어만 감독과 그의 아내이자 세트 디자이너 캐서린 마틴은 원작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대를 재현해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특히 유럽의 자본이 몰려들어 극도로 활성화된 당시 미국의 경제와 맞물려 유럽에서 성행하던 강렬하고 과감한 장식적 요소와 패턴 등을 강조하는 아르데코 스타일이 미국으로 고스란히 유입된 점에 주목해 대부분의 가구와 소품을 제작했다. 신흥 부자가된 개츠비와 당시 미국의 상위 계층인 데이지 등 다양한 인물의 파티 연회나 그들 각자의 집을 떠올려 보면 보다 쉽게 이해될 터.
위대한 개츠비 ©Warner Bros. Pictures /레볼루셔너리 로드 ©BBC Fil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