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장소를 옮겨 다시 문을 열었다. 일본 건축가 조 나가사카가 1990년대 지은 벽돌 건물을 갤러리로 새롭게 디자인했다.
조 나가사카 Jo Nagasaka라는 이름은 낯설지 몰라도, 그가 디자인 한 건축물은 한 번쯤 보았을 것이다. 조 나가사카(스키마타 건축 Schemata Architects 소속)는 카페 블루보틀의 공간 디자인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일본 디자이너이다. 일본에서만 11곳의 블루보틀을 설계했으며, 서울과 상하이의 블루보틀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그의 디자인은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만들기보다 기존 건축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듯 국제적 명성을 가진 조 나가사카가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디자인을 맡게 된 것은 운명이었다. 10여 년 전 우연히 안국역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방문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감동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런 인연으로 아라리오갤러리를 설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몰랐다. 조 나가사카는 아라리오 김창일 회장(씨킴)과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결이 비슷하다고 느꼈다. 김창일 회장은 아티스트이면서 동시에 사업가라는 연결되지 않은 두 캐릭터를 지니고 있기에, 솔직히 처음에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는 제주의 아라리오뮤지엄 세 곳도 방문하면서 우연을 운명으로 이어나갔다. 전격적으로 아라리오와 손잡았던 제주 프로젝트는 아트 호텔 디앤디파트먼트 바이 아라리오와 업사이클 의류 매장 솟솟리버스 등이다. 아시다시피 제주의 아라리오뮤지엄 세 곳은 각각 과거에 극장과 모텔이었고, 디앤디파트먼트 바이 아라리오는 자전거 판매점이었다. 이렇듯 제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것에 이어, 서울의 갤러리 디자인에도 참여하게 된 것.
“일본에서 회장 직함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 ‘더 깨끗하게, 더 인상 깊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데, 미술관을 보니 김 회장과 일하면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건물의 역사를 살린 디자인에 집중하는 것이 우리 둘의 공통점입니다. 다만 나는 그곳에 그 건물이 존재하던 때의 상황에 관심 있고, 김 회장은 누가 어떻게 왜 그 건물을 지었는가에 보다 집중하는 편입니다.” 아라리오 서울은 일명 ‘아라리오 타운’의 화룡점정에 위치하고 있다. 아라리오뮤지엄, 레스토랑 건물, 한옥 카페 프릳츠가 모여 있는 가장 오른쪽에 자리 잡았다. 아라리오뮤지엄은 1977년 건축가 김수근이 공간 사옥으로 사용하기 위해 완공한 등록문화재 586호로, 2014년 이곳에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아라리오 타운을 조성하게 된 것. 시원한 유리창이 아름다운 레스토랑 건물은 1997년 김수근의 제자 장세양 건축가가 설계한 것이며, 이번에 갤러리까지 들어서면서 한자리에서 예술과 미식을 만끽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장소의 역사성이 조 나가사카에게 고민을 안겨준 큰 요인이기도 했다
“강렬한 인상을 주는 까만 벽돌 뮤지엄과 유리 레스토랑 건물이 이미 있었기에, 그다음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지은 건축물의 대비 속에서 내가 할 일은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 더군다나 나는(그들의 정서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일본 사람이잖아요.” 그는 갤러리 건물도 김수근이 지었던 미술관과 같은 검은색 벽돌 외관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기존 건물들과 통일성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에, 한옥 앞 바닥부터 까만 벽돌로 정리하고, 갤러리 지하 1층으로 검은 벽돌이 이어지도록 했다. 그래서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는 두 개이지만, 전시는 항상 지하 1층에서부터 시작되는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통해 벽돌과 유리 건물의 대조 안에서 시간적 대비를 느낄 수 있게 했다. 다만 1990년대 지어져 사무실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도 왜 김수근의 건축물과 비슷한 검은 벽돌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얼마 전 호기심을 해결했다. 공식적으로 확인해봐야 하겠지만, 김수근의 제자에게 들은 바로는 서울시가 당시 공간 사옥 주변 건축물도 같은 검은 벽돌로 만들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갤러리 설계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그는 건물의 사용 목적에 따라 설계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주어진 환경과 기존 건축 소재가 있고, 그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할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갤러리 역시 기존에 해왔던 프로젝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화이트 큐브라는 갤러리의 필수 요건 외에는 추가적인 조건 없이 갤러리 건축을 완성하고자 했습니다. 설계한다는 것은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이 더 많습니다. 미술관을 단순한 벽돌 건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살펴보니 콘크리트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알아가는 과정이 건축가의 즐거움이지요. 처음에는 창덕궁이 좋은 풍경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작은 구멍으로 보고 풍경을 깨달아서 이를 적극 반영하게 되었습니다.” 과정에서의 인식이 설계에 반영되고, 건물을 이해하고 환경을 파악하게 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보람이다. 이는 어떤 종류의 설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은 주택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클라이언트를 100% 이해하기는 어렵다. 설계하면서 가족을 만나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늘 겪는다. 갤러리는 총 6층 건물인데, 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지하 1층부터 4층까지는 모두 화이트 큐브로 마감했다. 반면에 그림을 걸지 않는 리셉션과 계단은 화이트를 배제한 벽돌과 콘크리트다.
재개관을 맞아 젊은 남성 작가 5인의 <낭만적 아이러니 Romantic Irony> 가 층마다 열리고 있다. 갤러리 입구에는 권오상 작가의 브론즈 조각이 관람객을 반긴다. 지하 1층에서부터 전시를 보면서 위로 올라가는 동선을 추천한다. 엘리베이터가 있기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 동선이 더욱 극적이다. 검은 벽돌 바닥이 돋보이는 지하에서는 안지산 작가의 회화가 펼쳐진다. 눈 폭풍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먹고 먹히는 순환 관계를 묘사한 그의 쓸쓸한 그림은 요즘 인기가 높다.
1층은 2층과 천장을 텄기 때문에 높은 층고가 시원하다. 리셉션을 제외한 사방이 화이트 컬러이며, 김인배 작가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 김인배는 접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합판으로 만든 5.6m의 파주 지도, 각각 정형 · 비정형으로 만든 2개의 프로펠러 등이 재미있다. 엘리베이터 애호가라고 할지라도, 꼭 계단으로 올라가야 한다. 계단은 놀라운 전망의 포토 스폿이다. 미술 작품에 직사광선이 비추면 손상될 수도 있기 때문에 전시장은 창을 낼 수 없다. 그래서 계단이 있는 벽을 통유리로 만들어 창덕궁을 조망할 수 있게 한 것. 특히 과거 건축물의 흔적이 거칠게 남아 있는 벽, 천장과 달리 계단은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 묘한 구도를 이룬다. 조 나가사카는 관람객이 작품을 보고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풍경을 보며 기분 전환하기를 기대한다.
위로 올라감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은 이곳만의 특징이다. 3층에는 그로테스크한 인간 미니어처 작품으로 알려진 이동욱 작가의 5점의 신작이 있고, 4층에서는 노상호 작가가 AI 생성 이미지 도구로 만든 가상의 이미지를 다시 재구성해 그린 작품을 만날 수 있다. 5층과 6층은 원래 VIP 고객을 위한 공간인데, 재개관전에서 5층은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5층부터는 공식 전시장이 아니기 때문에 화이트를 줄이고, 콘크리트와 벽돌이 많이 보이게 전환했다. 가설로 화이트 벽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을 때는 이를 뺄 수도 있다. 지금은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있는 권오상 작가의 사진 조각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6층에서는 화이트, 벽돌, 콘크리트라는 3개의 주요 소재가 가장 잘 보이는 그러데이션을 발견할 수 있다.
“옥상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화이트를 배제했고, 창덕궁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전망입니다. 이러한 층별 여러 가지 시퀀스가 디자인의 주제이며, 외관적으로 강렬한 건물이기보다는 관람객의 체험을 통해 완성되는 공간 이기를 바라고 있어요. 당연히 작품이 이곳의 주인공이지만, 설명이 없어 도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공간 컨셉트가 느껴지면 좋겠습니다.”
공간과 재료의 물성을 드러내는 디자인 작업을 주로 해왔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건축에 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는 지속가능한 건축의 선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의도보다는 시대의 흐름과 맞물려 자연스럽게 영향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그가 몰두하는 작업은 철거해도 되는 집을 선정한 후, 이 집의 부분들을 옮겨서 새로운 상점을 만드는 핸드메이드 로컬 프로젝트이다. 또한 무인도에서 물과 태양을 에너지로 사용하며 인프라프리 생활을 하는 대형 프로젝트도 준비하고 있다. 팬데믹을 맞아 기후변화와 환경 문제에 대한 모두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한 작업이다. 버려진 재료를 활용하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는 이 새로운 프로젝트들은 아직 기밀이라고 하니, 빨리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21세기 건축가는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한다. 공간 디자인에 따라 삶의 방식과 철학이 변화하며, SNS가 발전하면서 모든 프로젝트는 완성 후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연결을 촉진하게 됐다. 이 것이 조 나가사카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