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기억을 깨우다

잠든 기억을 깨우다

잠든 기억을 깨우다
잠자고 있던 한옥이 새롭게 깨어났다. 설치미술가 양혜규의 작품으로 빈틈없이 채운 <동면 한옥>전의 면면.  
국제갤러리 본관 바로 옆에 자리한 한옥 전시관은 1935년에 지은 오래된 가정집을 개조한 것. 지난 프리즈 기간에 맞춰 양혜규 작가의 <동면 한옥>전으로 화려한 오픈식을 열었다.
  지난 2006년 8월, 인천의 한 민가에서 펼쳐진 양혜규 작가의 첫 번째 개인전 <사동 30번지>를 기억하는가. 서해 연안 부두에 인접한 사동의 한 폐가에서 열린 지난 전시는 지금도 다수의 미술인에 의해 기억되고 회자된다.  
인조 짚을 주 재료로 직조한 ‘중간 유형(2015~)’ 연작 중 하나인 ‘중간 유형 – 아쿠아 털보 전사 방패’. 협소한 한옥 전시관에 덩치 큰 조각들이 꽉 들어차 있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수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장소인 터라 주변에는 쓰레기가 가득했고 전기와 수도도 끊긴 지 오래였다. 작가는 전시를 위해 거쳐야만 했던 기초적인 단계를 ‘청소한다’와 ‘전기를 연결한다’는 행위로 정립했다. 깨진 거울, 조명 기기, 벽시계, 종이접기로 만든 오브제, 형광 안료 등 작품이라 하기에는 미미한 다양한 요소가 성긴 구성을 이루며, 일반적인 전시 형태에서 벗어난 과감한 시도가 엿보였다. 그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듯한 전시가 국제갤러리의 한옥 전시관에서 펼쳐졌다.  
중정에서 바라본 고즈넉한 한옥의 풍취와 가을 햇살이 따사롭다. 민속성과 수공예에 대한 작가의 오랜 관심을 보여주는 조각 ‘검정 속내 두발 희부연이(2015)’가 고개를 내민다.
  <동면 한옥>전은 지난 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립된 환경에서 보다 어엿한 작품의 형태를 갖춘 작업을 감상할 수 있다. 하지만 뜯다 만 벽지, 깨진 벽돌, 옴푹 파인 벽면에 그대로 남아 있는 낙서, 시트지를 덧댄 에어컨 등 연출 방식은 여전히 <사동 30번지>와 많이 닮아 있다. 이 같은 장소성은 물론 시공 중인 한옥이라는 고유한 시간성은 켜켜이 쌓인 지난 시간과 더불어 과도기적 연상을 자아낸다.  
거대한 벌집이나 열매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소리나는 행성 주머니 – 홍예 식물 지도(2023)’. 무지갯빛 방울을 가득 단 몸체에 해저, 사막, 열대 등 지역을 테마화하는 인조 식물을 담은 주머니로 구성되어 인공물과 자연을 동시에 아우른다 . 생명체의 머리가 바닥에서 들린 형국의 ‘중간 유형 – 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2020)’ 는 상승하려는 건지, 내려앉은 듯한 모습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특징. 한 팔은 먼 대들보 위에 걸쳐 있고 몸통 밑으로는 방울 촉수를 드리운다.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전설 속 이무기 또는 신비한 생물체를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제목으로 차용한 ‘동면’이 주는 느낌을 전시의 주된 테마로 선정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코끝을 스치는 한약재 냄새와 바닥에 흩어진 전기 양초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어느 한 구석에는 방치되듯 작품들이 바닥에 놓여 있고, 또 다른 구석에는 저장용 항아리나 가마니를 보관해둔 창고처럼 작업물이 가득 들어차 있다. 비교적 협소한 공간이지만 규모가 큰 작가의 작품을 밀도 있게 배치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들보가 있는 복도에 설치한 ‘중간 유형-서리 맞은 다산의 오발 이무기(2020)’ 작품은 마치 용이 되지 못한 하얀 이무기가 승천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팔을 하늘로 뻗는 듯하다.     반면 전시장 입구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비교적 익숙한 전시장을 떠올리게 한다. 또 한 가지 특별한 점은 작품을 비추는 그 흔한 핀 조명은 물론 천장 조명도 마다했다는 것.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토템 로봇(2010)’ 연작을 제외하면 전기 양초와 자연광이 전시장을 밝히는 빛의 전부다.     이번 전시는 유보적 휴면 상태에 놓여 있는 공간을 적극 활용한 덕분에 휴면에 접어든 상태이지만, 또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하는 잠재성 또한 느껴지는 양면의 매력을 지녔다. 다가오는 10월 8일 <동면 한옥>전은 막을 내리고 대대적인 공사에 돌입할 예정이다. 유보적 휴면 상태에서 벗어나 또 어떠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지 기대된다.  
처마 밑 서까래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지상에서의 위기 상황을 모면하는 남매를 그린 전통 설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 영감받은 설치작 ‘소리나는 동아줄(2023)’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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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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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의 별, 강민철 레스토랑

청담동의 별, 강민철 레스토랑

청담동의 별, 강민철 레스토랑
오픈한 지 1년 만에 미쉐린 가이드의 별을 획득한 강민철 레스토랑은 새로운 것을 찾아 탐구하는 천재의 실험실에 가까웠다.  

  아마도 강민철 레스토랑은 <미쉐린 가이드 서울>에서 최단기간에 별을 받은 레스토랑이자 가장 작은 규모의 레스토랑일 것이다. 2022년 오픈한 지 불과 1년 만에 첫 별을 단 데다 2023년에도 어김없이 하나의 별을 받았다.  
강민철 레스토랑을 진두지휘하는 강민철 셰프.
  이곳을 이끄는 강민철 셰프는 24살 즈음 무작정 해외로 떠나 조엘 로부숑, 알랭 뒤카스, 피에르 가니에르 등 세계 3대 프렌치 거장의 레스토랑을 모두 거치며 다채로운 경험을 쌓아온 이다. 소위 ‘초엘리트 코스’를 밟은 강민철 셰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배주현 작가와 협업해 만든 트러플 함. 100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 아프리카산 나무 손잡이를 달았다.
  “혹시 마요네즈가 불어인 거 아세요? 미국에서 시작했는데, 홍콩을 거쳐 자연스럽게 파리에 정착하게 됐어요. 양식의 모든 뿌리는 결국 프렌치에서 시작하더라고요. 피에르 가니에르에서 일한 지 4년 정도 됐을 무렵 코로나19로 유럽이 셧다운됐어요. 한국을 떠난 지 20년 정도 됐을 무렵 돌아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는데, 13년 정도 됐을 때 갑작스럽게 들어오게 된 거예요.”  
메뉴와 함께 서빙되는 크리스토플 커틀러리.
  3년 전쯤 한국으로 돌아온 강민철 셰프는 한남동 쪽에 레스토랑 오픈을 준비 중이었다. 허가를 비롯한 여러 법적 문제로 인해 예상보다 늦어졌고, 그 시간 동안 원 테이블 레스토랑 겸 작업실을 열어 연구해보자는 마음으로 이 공간을 만든 것. 딱히 떠오르지 않아 이틀 만에 떠오른 상호명으로 강남구청에서 영업 신고를 마쳤다. 청담동 어느 빌라 지하에 자리한 강민철 레스토랑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간판도, 그 어떤 홍보도 없었지만 입소문만으로 손님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의 반응은 예상보다 훨씬 뜨거웠다.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아르마니 실크를 바른 레스토랑 홀.
  미쉐린 별과 함께 찾아온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하나에 불과했던 테이블은 현재 세 개까지 늘어났다. 10여 명의 스태프가 함께 일하기엔 다소 비좁아 보이는 키친과 홀의 크기가 비로소 이해되는 부분이다.  
캐비어를 올린 비빔밥. 드라이 에이징한 채끝살과 송아지 흉선을 굽고, 시금치튀김과 함께 찬 개념으로 곁들였다.
  오픈한 지 이제 갓 2년이 넘은 강민철 레스토랑에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없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메뉴판이다. 9~12코스에 달하는 메뉴가 거의 매일 바뀌는 탓에 애초에 메뉴판을 만들지 않기로 결심한 것.  
셀러리악 퓌레를 곁들인 한우 안심스테이크. 직접 만든 꽃 모양의 튀일로 크리스피한 식감을 더했다.
  “저희는 시즌별이나 체계적으로 메뉴를 바꾸지 않아요. 갑자기 생각나면 만들어보고 맛이 괜찮으면 손님 상에 올리는 식이에요. 그저께부터 내기 시작한 캐비어 비빔밥은 새벽 3시쯤 갑자기 떠오른 메뉴인데, 새벽 5시쯤 먼저 와서 만들어봤어요. 밥집에서 먹은 비빔밥을 어떻게 재해석해볼까 고민한 결과죠. 메뉴 구성이나 플레이팅은 주로 어디서 영감을 받냐고 많이들 물으시는데요. 사실 명쾌한 답이 없어요. 미술관을 가거나, 공연을 보거나 하는 것도 전혀 없고요. 그냥 일상에서 느낌이 가는 대로 하는 거죠(웃음).”  
스시를 먹다가 생각해낸 멜론 스시. 위에는 캐비어를 올렸다.
  강민철 레스토랑에는 대부분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이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비기, 시그니처 메뉴가 없다. 매일 같은 메뉴를 봐야 하는 게 지겨워서라는 대답을 내놓은 강민철 셰프는 스스로 ‘프렌치’를 하는 셰프라 정의 내리지 않는다. 다만 손님들이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경험을 이곳에서 하길 바랄 뿐이다. 아늑한 동굴 같은 분위기를 주기 위해 장인이 손으로 한 땀 한 땀 뜬 아르마니 실크로 벽을 바르고,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창의적인 기물을 위해 기성품 대신 작가를 찾아 나서며, 양식 파인다이닝 하면 으레 예상하는 틀과 고정관념을 최대한 깨부수려 노력하는 이유다. 다만 화려하게 보이는 퍼포먼스를 넘어 손님들의 눈과 입이 강민철의 음식에 ‘압도되길’ 바란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 샴페인으로 만든 폼과 캐비어, 치즈 베이스 크림 위에 각종 계절 채소(그린빈, 콜라비 피클, 호박, 래디시)를 올려 아삭한 식감이 돋보이는 채소 타르트, 성게알을 곁들인 미니 타르트와 염장한 농어와 무와 사프란 젤리를 얹은 타르트, 페이스트리 파이로 만든 스틱과 흑임자로 만든 크림.

  코스의 흐름이나 식재료도 매일 바뀌는 탓에 한번은 고기를 기대하고 온 손님이 밥과 채소로 만든 메인 메뉴를 받아 들고 항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지금껏 변함이 없다. “요즘 대부분의 한정식집 잡채에는 빨간색 파프리카가 들어가잖아요. 우리 고유 음식인데 파프리카라니 처음에는 굉장히 의아하더라고요. 시대가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틀이 깨지고 변한 거죠. 좋고 나쁨을 넘어 흐름은 지속적으로 변화할 거예요. 저도 그러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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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er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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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하는 자연

공명하는 자연

공명하는 자연
지난 8월 16일부터 송은에서 시작한 <Panorama>전이 한창이다. 권혜원, 김지영, 류성실, 이진주 등 다양한 주제와 매체를 탐구하는 작가 16인의 작업을 소개한다.  

  무엇보다 전시 연계 스페셜 프로그램에 내 마음이 동했다. 스위스 출신의 안무가 안나 안데렉의 퍼포먼스 공연에 참석했는데, 디지털과 실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전시 마지막 날인 10월 28일에 열리는 그레이코드 지인 GRAYCODE jiiiiin의 <델타 더블유∆w> 전자음악 콘서트도 무척 궁금하다. 두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의 시청각적 심상과 경험을 위해 서귀포 바다에서 추적한 다양한 층위의 진동수와 주기 등 무작위의 자연을 소리로 모델링했다. 송은을 공명하고 연주하는 공간 삼아 자연을 실체적 대상으로 드러낼 예정이라니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WEB songeu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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