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를 통해 1800년대 최신 유행 패션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전시가 열린다.
화가의 이름은 몰라도 블랙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고개를 돌린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은 어디선가 본 적 있을 것이다. 여기서 영감을 받은 여러 패션 매거진은 비슷한 옷을 입은 니콜 키드먼, 줄리안 무어와 함께 그림처럼 포즈를 취한 스페셜 화보를 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그림은 미국인이지만 평생을 유럽에서 보낸 존 싱어 사전트 John Singer Sargent(1856~1925)의 ‘마담 X’라는 작품이다. 그의 아버지는 병약한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살기로 결심한다. 이후 의사를 그만두고 유럽 곳곳을 다니는 방랑자의 삶을 선택한다. 덕분에 사전트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태어나 정규교육 대신 부모님께 교육을 받으며 유럽 곳곳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자랐다.
특히 그가 두각을 드러낸 분야는 그림이었다. 가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경을 수채화로 남겼고, 특히 부유층의 초상화로 인기를 끌었다. 블랙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공도 그중 하나로, 당대 프랑스 최고의 미녀로 꼽혔던 고트로 부인이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담은 그림이 전시회에 출품되면 더 큰 찬사를 받을 것으로 생각한 그녀의 기대와 달리, 1884년 파리 살롱 전시에서 이 작품은 모두의 조롱거리가 된다. 흘러내린 어깨 끈, 딱 붙은 검은색 드레스, 창백하다 못해 파래 보이는 하얀 피부, 지나치게 높은 코, 평소 그녀에 대해 품고 있던 질투도 한몫 더해 심한 비평의 대상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상심한 작가는 파리를 떠나 런던에 정착하게 되고, 이 그림을 평생의 대작으로 간직하다 훗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판매한다(어깨 끈이 흘러내려 에로틱하다고 비판받았던 것을 의식했는지 다만 어깨 끈은 수정했다). 파리 전시회의 스캔들을 뒤로하고 수많은 부인을 화폭에 담으며 마침내 스페인의 대가 벨라스케스에 못지않은 초상 화가라는 인정을 받게 된다. 사전트는 부유한 고객을 상대하면서도 종종 그들의 의상을 정해주기도 하고 혹은 멋지게 차려입은 옷을 변경하기도 했다.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던 벨레스케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단지 명령을 수행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위해 모델을 조율하는 감독과도 같은 포지션을 취했던 것이다. 평범한 인물이 마치 영화 속 캐릭터처럼 개성적이고 매력적인 분위기를 뿜어낼 수 있었던 것도 작가의 연출력 덕분이고, 어쩌면 그 힘 때문에 많은 부호가 사전트의 초상화 모델이 되기 위해 줄을 섰던 셈.
이처럼 사전트의 작품은 패션과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점을 주목한 전시 <사전트의 패션 Fashioned by Sargent>가 미국 보스톤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작가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 자주 방문했던 보스톤은 1988년 미국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이기도 하다. 전시에는 50여 점의 대형 초상화와 작품 속 패션의 시대상을 알 수 있는 다양한 의복, 액세서리를 함께 선보인다. 영국 테이트브리튼과 협력한 이번 기획 전시는 보스톤(10월 8일~24년 1월 15일)에 이어 런던(24년 2월 21일~7월 7일)까지 이어지는데, 내년에 런던을 방문하는 이들이라면 놓치지 말고 관람할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