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위로 높이 솟은 연꽃처럼 불교미술을 꽃피운 동아시아 여성들의 염원과 삶.
호암미술관이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조망하는 대규모 기획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을 선보인다. 지난해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이후 재개관한 호암미술관의 첫 번째 고미술전이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불교미술을 ‘여성’이란 관점에서 조망하며, 전통 미술을 동시대적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보고자 한 시도가 돋보인다. 여성은 오랜 시간 불교를 지탱해온 옹호자이자 불교미술의 후원자와 제작자로 기여해왔다. 이들이 불교에서 본 염원과 번뇌, 공헌을 조망하며 불교계 내 여성에 대한 존재감을 따라가본다. 더욱이 화폭 안에서 단순히 대상화되는 존재던 여성이 그림 밖에서 불교미술을 통해 보여준 주체적인 움직임을 함께 주목했다. 전시 제목인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은 석가모니 부처의 말씀을 모은 최초의 불교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인용했다. 불교를 신앙하고 불교미술을 후원 제작한 여성들을 진흙에서 피되 물들지 않은 청정한 연꽃으로 비유한 것이다. 진흙 위로 높이 솟아 만개한 연꽃처럼, 사회와 제도의 제약에서 벗어나 본연의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 각지에 소재한 불교미술 작품 92건을 한자리에 모았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영국박물관, 도쿄국립박물관 등 해외 유명 박물관을 시작으로, 국내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기증품 9건을 포함해 리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 불교중앙박물관 등이 함께했다. 불상, 불화, 나전경함, 자수와 도자기 등 전 세계 27개 컬렉션에서 모은 귀중한 걸작들을 폭넓은 장르로 소개한다. 더욱이 이 중 9건은 국내에서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작품이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금동 관음보살 입상>을 비롯해 <감지금니 묘법연화경권1-7>, <아미타여래삼존도>, <수월관음보살도> 등 귀한 작품을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또한 해외에 흩어져 있던 조선 15세기 불전도 세트의 일부를 세계 최초로 한자리에 전시한다. 불전도는 조선 초기 왕실 주도로 편찬된 한글 불전문학에 근거해 석가모니의 일생 전후를 그린 불화다. 일본 혼가쿠지 소재의 <석가탄생도>와 독일 쾰른동아시아미술관의 <석가출가도>에는 각각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 부인과 부인 구이가 등장하며, 이를 통해 불교에서 보여진 여성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1부는 <석가탄생도>와 <석가출가도>를 비롯해 불교미술 속 재현된 여성상을 다뤘다. 인간, 보살, 여신으로 나누어 지난 사회가 여성을 바라본 시선을 그렸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여성의 유형은 어머니. 모든 중생을 굽어 살피는 자비의 마음을 모성적 가치로 인식한 불교의 역사 속에서 관음보살은 젊은 청년의 형태에서 점차 온화한 미소를 띤 여성형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면 젊은 여성의 몸은 집착과 정념의 근원으로 간주되며 부정한 대상으로 그려진 이중적 시선도 함께 주목했다. 죽음 이후 시신의 분해 과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관찰하며 삶의 무상함을 깨닫는 구상도는 대부분 여성의 시신으로 그려졌다. 생생한 삶을 간직했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까지의 과정을 여성의 몸으로 적나라하게 묘사한 일본의 구상도 <구상시회권>은 관음보살의 미소와 대비되며 여성에 대한 이중적 시선을 잘 보여준다.
2부는 불교미술의 후원자와 제작자로서 살아간 여성들의 삶을 조망한다. 특히 유교적 가치관이 지배했던 조선시대에 왕실 여성들은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교를 지지하고, 독보적인 후원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사회적 제도를 뛰어넘어 강한 염원과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 덕에 남겨진 품격 있는 불화와 불상을 만나본다. 문정왕후가 발원한 <영산회도>와 <석가여래삼존도>, <약사여래삼존도> 등 왕실 여성들이 발원한 불화와 불상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적 내세를 보여준다. 또한 여성의 필수 미덕으로 간주된 자수와 복식을 예술로 승화한 작품들도 돌아본다. 그 중 신체 일부인 머리카락으로 자수한 수불을 눈여겨보자. 수불은 신체 일부를 새겨넣어 무량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공양물이자 부처와의 직접적인 연이 닿는 매개체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부정하다고 여겨진 여성 신체의 일부인 머리카락을 부처의 형상을 구현하는 귀중한 재료로 탈바꿈시킨 주체적인 의지가 담겨 있다. 전시는 오는 6월 1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