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나의 미술 행사를 봐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베니스 비엔날레다. 2년에 한 번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베니스 비엔날레 미술전 말이다. 올해는 4월 20일부터 11월 24일까지 열리니 휴가차 다녀오기에도 적합하다.
Part 1 제60회 베니스 비엔날레 키워드 7
예술감독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Adriano Pedrosa가 브라질 출신 퀴어 큐레이터라는 점만으로도 관전 포인트를 예측해볼 수 있을 것. 아무리 공명 정대한 감독일지라도 자신의 정체성을 전시에 반영할 수밖에 없고, 자신이 잘 아는 분야의 작가 군단을 초대하기 마련이다. 본전시의 주제는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 Foreigners Everywhere’이다. 이 문구는 컬렉티브 그룹 클레어 퐁텐 Claire Fonraine이 2004년 시작한 작품에서 유래했는데,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라는 영문 네온사인 작품을 발견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 인종 차별과 외국인혐오증에 맞서 싸운 집단의 이름에서 유래한 문구다. 외국인은 세계 어디에나 있으며, 우리 모두가 이방인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더불어 예술가들이 여러 이유로 항상 여행하고 있다는 의미도 내포한다. 따라서 주요 초점은 외국인, 이민자, 국외 거주자, 디아스포라, 망명자, 난민, 특히 세계 남부와 북부를 이동하는 예술가들에게 있다. 세계 최고 비엔날레로서 베니스에서 관심을 모은 미술가와 미술 경향은 곧장 미술관과 갤러리 전시, 아트 페어 출품으로 이어진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비상업적 예술 축제이지만 상업적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몇 년 전만 해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주목받은 작가의 작품이 미술 시장에 등장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지만, 최근에는 바로 다음 아트 페어와 갤러리 전시에서 이들 작품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는 6월에 열리는 넘버 원 아트 페어인 스위스 아트 바젤 바젤에서 이번 비엔날레 작가들의 작품을 확실히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비엔날레가 열리는 두 개의 전시장 아르세날레 Arsenale와 자르디니 Giardini로 지금 출발해보자.
1 한국 미술의 물결
이번 비엔날레에 작품을 선보인 작가는 총 331개 팀인데, 생존 작가는 40% 정도다. 예술감독은 생존 작가에게 큰 전시 공간을 주었고, 작고 작가의 작품은 전시 속 전시의 형식으로 소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강승, 김윤신, 고 이쾌대, 고 장우성 작가의 작품이 초대되었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감독이 지난해 한국을 직접 찾아와서 이 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했다. 자르디니 국가관의 한국관에서는 한국의 향기를 주제로 삼은 구정아 작가의 <오도라마 시티>가 펼쳐지고 있다. 베니스 비엔날레는 아르세날레와 자르디니에서 열리는 본전시뿐 아니라, 베니스 시내에서 열리는 병행 전시와 외부 전시가 수백 개라는 점이 매력적이다. 한국 작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병행 전시와 외부 전시도 10개에 이른다. 그동안 <단색화>, <윤형근> 개인전 등 한국 작가의 전시가 꾸준히 열리기는 했지만 이렇게 많은 한국 전시가 열리는 것은 처음이다.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인증을 받은 30개의 병행 전시 Eventi Collaterali에 한국 기관과 갤러리에서 기획한 <이성자: 지구 저 편으로>, <광주비엔날레: 마당, 우리가 되는 곳>, <이배: 달집 태우기>, <유영국: 무한 세계로의 여정>이 포함되어 있다. 외부 전시로는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참여 작가 38개 팀 전시 <모든 섬은 산이다>, <신성희> 개인전, 국내외 작가 35명 그룹전 <노마딕 파티>, <이승택과 제임스 리 바이어스> 등이 관심을 모았다. 한국 작가 전시만 보아도 시간이 부족하다. 한국 작가들의 대규모 베니스 전시는 한국 미술을 알리는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기대된다.
2 황금사자상의 의미
자르디니와 베니스 시내 곳곳에는 총 87개의 국가관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올해 처음으로 참가하는 국가는 베냉 공화국, 에티오피아, 동티모르 민주공화국, 탄자니아 연합공화국의 4개국이며, 파나마와 세네갈은 자국 국가관을 가지고 첫 참가했다. 본전시 작가뿐 아니라 국가관도 황금사자상 수상 후보이다 보니, 비엔날레가 국가 올림픽과 다름없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오프닝 직후 열리는 수상자 발표가 어떤 전시 작품에 중점을 두어야 할지 모르는 초보 관람객에게는 명확한 감상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올해 황금사자상은 두 개 부문 모두 남반구에서 탄생했다. 황금사자상 최고작가상은 뉴질랜드 마오리족 여성 작가 4인으로 구성된 마타호 컬렉티브가 선정됐다. 아르세날레 입구에 설치된 이들의 대형 섬유 설치 작품은 포토 스팟으로 유명하다. 황금사자상 국가관상은 미술가 아치 무어가 참여한 호주관이 차지했다. 호주 토착민 출신의 아치 무어는 분필로 호주 원주민의 역사를 그려넣은 작품을 선보였다. 뉴질랜드와 호주가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집트 출신 터키 예술가 닐 얄테르 Nil Yalter와 이탈리아 출신 브라질 미술가 안나 마리아 마이올리노 Anna Maria Maiolino는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3 정치적 이슈의 그림자
예술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올해도 여기 저기서 시위가 열렸고, 자르디니 26개 국가관 중 두 곳은 전시를 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국가관은 개막 전부터 전시 반대 여론에 시달렸고, 결국 전시하지 않기로 했다. 이스라엘 대표로 참석하는 작가 루스 파티르는 ‘휴전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잡치한 인질 석방 합의가 이뤄지면 전시관을 열 것’이라는 문구를 붙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022년 비엔날레에 이어 올해, 두 번 연속 국가관 전시를 열지 못했다. 국가관이 없는 볼리비아가 러시아 전시관에서 대신 전시를 열었다. 베니스 곳곳에는 ‘인종 학살 국가관을 반대한다’는 대량학살반대예술연맹(ANGA)의 포스터가 붙었다. 곳곳에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을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붉은 종이가 뿌려졌다. 우크라이나는 국가관 전시는 아니지만 비엔날레 병행 전시 <데어 투 드림 Dare to Dream>를 갖고 있다.
4 K-큐레이터의 힘
한국 미술가뿐 아니라 한국 큐레이터도 재능을 뽐냈다. 김해주, 이숙경 큐레이터가 각각 싱가포르관과 일본관 예술감독을 맡아 멋진 전시를 선보인 것. 김해주 큐레이터는 현재 싱가포르 아트 뮤지엄(SAM)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2022년 부산 비엔날레 예술감독 출신이다. 미술가 로버트 자오 런휘가 김 큐레이터에게 협업을 제안했다. 로버트는 환경과 인간의 삶을 탐구하는 작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싱가포르에 형성된 이차림(Secondary Forest)과 그 안의 새로운 생태계에 대한 영상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영국 맨체스터대학 휘트워스 뮤지엄 관장이자 2023년 광주 비엔날레 감독을 맡은 이숙경 큐레이터가 일본관 큐레이터로 임명되어 미술가 모리 유코와 손을 잡았다. 모리 유코와 이 관장은 지난해 광주 비엔날레에서도 좋은 호흡을 보여주었다. 모리 유코는 장소 특정적 설치 작품과 사운드 아트로 알려졌으며,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일상용품을 통해 예술과 생명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5 스타 작가는 건재하다
이번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는 누구일까? 아마도 자르디니 초상화 섹션에 자화상이 걸려 있는 프리다 칼로일 것이다. 프리다 칼로의 작은 작품 앞에는 직원이 항상 서 있을 정도다. 그만큼 이번 비엔날레는 스타 작가를 내세우기보다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작가 중심의 구성이 매력적이다. 하지만 병행, 외부 전시에서는 지금 미술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미술가 에디 마티네즈, 마우리치오 카텔란, 윌리엄 켄트리지, 이우환, 쩡판즈, 피에르 위그, 짐 다인 등의 전시를 만날 수 있다. 게다가 이 작가들이 베니스를 직접 찾아오자 미술애호가들은 환호했다. 골목에서, 전시장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스타 작가들은 비엔날레의 묘미다. 스타 작가들이 바쁜 스케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곳에서 전시를 연다는 것은 베니스 비엔날레가 상업적으로도 큰 힘이 있다는 방증이다. 베니스에서 최고의 전시를 선보인다는 것은 작가의 자존심과 직결된다.
6 남미 작가들의 부상
이번 비엔날레 주제는 ‘이방인은 어디에나 있다’인데, 직관적 주제이다 보니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에 작품 캡션마다 작가의 고향과 활동 도시가 어디인지 살펴보게 되는 단점도 있다.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예술감독이 비엔날레 최초로 남미 출신이다 보니,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남미 작가 작품을 대거 발견할 수 있다. 유럽 한복판 베니스에서 남미 작가의 작품을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7 퀴어 전성시대
아드리아노 페드로사 예술감독이 퀴어이다 보니, 퀴어 작가의 전시가 강세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퀴어’는 성(性) 소수자의 의미이지만, 이번 비엔날레에서는 ‘이방인’의 하나로도 여겨진다. 섹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의 작품이 중심을 이루는 퀴어 작가 작품은 비엔날레 곳곳에 등장한다. 또한 캐나다, 중국, 홍콩, 인도, 멕시코, 니카라과, 파키스탄, 페루, 필리핀, 남아프리카, 미국 퀴어 작가의 작품을 모은 큰 전시장이 있다. 그리고 중국, 이탈리아, 필리핀 작가의 작품을 모은 퀴어 추상화 섹션도 발견할 수 있을 것. 우리나라의 이강승 작가도 퀴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박해를 받고 인정받지 못한 퀴어 작가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다. 일부 작품의 작가 설명에는 아예 작가의 성 정체성을 밝혀 관람객의 작품 이해를 돕는다.
한국 현대미술의 정수는 무엇인가?
최정주 전시감독과의 만남
<한국 미술의 정수: 손에서 정신으로의 여정>의 감독 최정주에게 전시에 대해 물었다. 콘실리오 유럽 델 아르테 재단 Concilio Europeo dell’Arte Foundation 공모를 통해 최우수 콘텐츠로 선정된 협력 전시라는 점이 특별하다.
지난 4월 베니스 비엔날레와 더불어 전시가 시작되었는데, 현지 평가는 어떤지 궁금하다. 전시장 인파라디소 아트 갤러리가 자르디니 초입에 위치하고, K-아트 전시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5월 중순 현재 하루 평균 200명, 주말에는 300~400명 정도가 방문할 정도로 인기다. 학생부터 미술 관계자까지 단체로 찾아오기에, 주말 오후에는 이탈리아어와 영어 도슨트를 진행한다.
기하 추상의 하인두, 단색화의 박서보, 신형상회화의 고영훈, 미디어 설치의 정혜련 등 한국미술의 미술 경향 중 한국 현대미술 경향 네 개와 작가 네 명을 선정한 기준은 무엇인가? 1970~80년대 미술 흐름인 단색화가 재조명된 것은 한국 현대미술 원류가 지닌 저력을 증명하는 것. 이제 세계 관심은 ‘K-아트의 다면적 특성이 무엇인가’라는 지점으로 옮겨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획자로서 1960년대부터 동시대까지 이어져온 미술의 연대기적 특성과 고유성을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1960년대 말의 기하추상부터 1970년대의 단색화, 1980년대의 신형상회화, 동시대의 복합매체 현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은 새로운 조형 실험의 필요성과 한국적 예술의 정립에 대한 시대적 염원을 제시한 대표적 미술 현상이다.
전시 제목 <한국 현대미술의 정수: 손에서 정신으로의 여정>의 의미를 설명해달라. 한국 현대미술은 빈손으로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로 인해 전통의 맥을 놓치고 전쟁이 쓸고 간 황폐한 환경을 극복하면서 지형도를 스스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작가 신체를 상징하는 손은 새로운 조형적 자극을 체득하는 창구였고, 이는 고유의 전통과 철학을 내재화하는 과정을 거쳐 시대와 호흡하는 정신적 가치를 발화하며 나아갔다. 하인두 작가는 기하추상의 조형성에 전통과 생명의 가치를 투영했고, 동서양의 미학을 재해석하는 독자적 언어를 정립했다. 또한 박서보 작가는 노동의 신성성을 한국적 미감과 동양 철학의 정신성으로 꽃피워 독특한 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 그리고 고영훈 작가는 대상의 형상을 극사실적으로 강조해 본질이 지니는 근원적 의미를 들여다보게 하는 신형상회화의 물꼬를 트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돌아보게 했다. 정혜련 작가는 전통적 미감과 정서를 현대의 융복합적 설치로 재해석해 전통과 현대, 자연과 인간이 교차하는 공감대를 형성해왔다. 그동안은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특정 장르나 작가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이제는 미술사적 접근과 심층 분석을 전제로 한 기획이 뒷받침되어야 할 때다. 전시는 11월 2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