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로잉과 조각의 유연한 경계 속에서 일상의 풍경을 담아내는 황혜선 작가의 평창동 작업실을 찾았다.
북한산의 장엄한 산세를 병풍처럼 두른 호젓한 평창동 언덕 자락. 비어 있던 공터 위에 지난겨울 한 건물이 들어섰다. 드로잉과 조각의 경계를 탐구하는 황혜선 작가의 작업실이다. 오랜 시간 육아와 병행하며 작업 활동을 해야 했기에 작업실은 늘 집과 멀지 않은 도심에 위치해 있었다. 시간이 흘러 아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성인이 됐고, 작가는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공간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서초동과 신사동, 성수동으로 나돌던 작업실은 이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온전해졌다. “제 고모님이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판사였는데, 일찍 돌아가시게 되자 할머니께서 그 따님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절을 짓고 한평생 사셨어요. 저도 이 동네에서 나고 자라 어렸을 때 이 근처 개울에서 수영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 이후에 다른 스님들이 운영하다가 절이 전소돼 공터로 남아 있던 땅이었죠. 작업은 계속 늘어나는데,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제 작품을 잘 정리하고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고 같은 곳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전에 울산 인보성당의 성물 작업을 함께한 건축집단 MA 건축사무소의 유병안 대표에게 건축 설계를 부탁했습니다.”
건물은 크게 3개 층으로 나뉜다. 1층은 황혜선 작가의 작업실. 드로잉 작업을 자유롭게 붙일 수 있도록 한쪽 벽면에는 큰 철판을 설치하고, 안쪽에는 작품들을 최적의 환경에서 보관할 수 있는 수장고로 꾸몄다. 무엇보다 입구에 대형 스테인리스 철문을 설치해 작품 실을 트럭이 원활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점이 돋보인다. 탁 트인 개방감과 다소 이국적인 분위기 는 5m가 넘는 높은 천고 덕분이다. 한 층 위로 올라가면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 갤러리 공간과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다이닝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새하얀 벽, 빛과 그림자의 움직임으로 가득한 작은 갤러리는 그가 걸어온 길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이곳으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아래 층에서부터 시작되는 계단과 엘리베이터, 마당 등 각기 다른 네 가지 동선이 있는데, 어떤 방향에서 들어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큰 유리창을 통해 자연이 깊숙하게 드리우는 3층은 오로지 명상을 위한 장소다. 아래 층과 다르게 전반적으로 따뜻한 분위기의 나무 소재를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가부좌를 틀어도 충분히 넓은 명상용 의자는 특별 제작한 것. 앞으로 이곳에서 싱잉볼을 비롯한 생활 속 명상 클래스를 종종 오픈할 계획이다. 3층 테라스에 난 계단을 따라 한 층 더 올라가면 이곳의 백미인 옥상이 등장한다. 그 어떤 인공물도 없이 푸르른 하늘과 북한산의 나무와 기암괴석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울울창창한 자태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온다. 설계를 맡은 유병안 대표는 이곳의 장소성에 대해 오랜 고민이 있었다고 말을 덧붙였다.
“몇십 번을 오면서 느낀 점 중 하나가 어느 높이에서 어떤 방향을 바라 보느냐에 따라 정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풍경을 다채롭게 들이기 위해서 각 층을 박스처럼 구성해 각도를 다양하게 배치했어요. 무엇보다 황혜선 작가의 작품은 벽에 설치하는 것이 대다수라 굉장히 정면성이 있잖아요. 건축물은 그와는 정반대로 정면이 없도록 설계했죠. 보통 도면을 그리면 정면도, 측면도, 배면도 이런 식으로 나뉘는데, 이 건물은 보는 방향에 따라 어느 쪽도 정면이 될 수 있는 거예요. 또 건물이 최대한 이곳의 자연 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길 바랐어요.”
오랜 시간 고대하던 작업실이 완공되고, 매일 아침 황혜선 작가는 마치 여행을 떠나오는 것 같은 설렘으로 이곳을 찾는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하게 작업하며 조금씩 변모해온 작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유학하며 소통의 단절을 토로한 작품부터 드로잉과 조각의 경계에 담아낸 일상 속 풍경까지, 형태와 소재는 달라졌을지라도 그 속에 담긴 관점은 점차 따뜻해져갔다. “저는 일기를 쓰듯 매일 스케치를 하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주변 사람들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더라고요. 저 스스로도 굉장히 의아했어요. 이전에는 제 작품에 사람이 없고 사물뿐이었거든요. 40대가 지나고 50대를 맞이하면서 제가 사람을 사물처럼 볼 수 있는 담담한 힘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거죠.” 다른 이들과 함께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늘 일상에서 주제를 발견한다는 황혜선 작가. 다가올 12월의 개인전에서는 또 어떤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를 맞이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