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역사가 담긴 근대 건축물이 가득한 서울 정동길은 산책하기 좋은 거리다.
이곳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덕수궁 중명전에서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종규 이사장을 만났다.
덕수궁 중명전 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김종규 이사장. 1층은 역사의 현장을 담은 전시장이고, 2층이 그의 사무실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을 아는지?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 National Trust에 비견하는 우리나라의 문화유산 보호 기관이다. 보전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활용하는데, 민간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8개의 국가 소유 문화유산, 매입과 증여를 통한 4개의 문화유산 등 총 12개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이곳이 매입한 첫 문화유산은 서울 통인동 ‘이상의 옛집 터’다. 2009년, 시인 이상이 21년간 살았던 집을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만들었다. 그 외에 우리에게 알려진 문화유산으로는 보성여관, 전주 박다옥, 인천 조흥상회 등이 있다.
보성여관은 아름다운 리노베이션으로 유명하다.
“12개 중에서 울릉도 역사문화체험센터 방문을 특히 추천하고 싶어요. 1910년대에 일본인 제재업자, 고리대금업자가 만든 일본식 2층 주택입니다. 2008년부터 우리가 관리하고 있으며, 지금은 울릉도 역사 전시관이자 커뮤니티 공간으로 쓰고 있어요. 과거의 아픔도 있지만 울릉도 소나무로 만든 건물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역사관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특별하지요. 독도와 더불어 울릉도의 유산은 일본과 시시비비가 걸려 있으니,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관리를 잘 하고 지켜야겠다는 각오를 다집니다. 주민뿐 아니라 관광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으니 고마운 마음이지요.” 울릉도로 가는 배편이 좋아져 관광객이 늘고 있고,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가 자주 방문하는 곳은 부산 문화공감 수정이다. 1939년 지은 일본식 2층 목조 건물인데, 일본 무사 계급의 전형적인 주거양식이 잘 보존되어 있다. 근대 주택건축사의 자료로 가치가 있으며, 지금은 근대생활사 전시관으로 쓰인다. 부산이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이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문화유산이 많기 때문에 이곳이 그 본보기가 되기 바라는 마음이다.
그렇다면 문화유산이 왜 중요한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파리에 근대 건축물이 없다면 아무도 파리를 낭만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고, 상하이에 근대 건축물이 남아 있지 않다면 상하이를 ‘아시아의 진주’라고 부르지 않을 것. “만약 우리나라에 품격 높은 문화유산이 없다면 K팝의 탄생이 가능할까요? K컬처가 가능할까요? 우리나라는 5000년의 문화에서 비롯된 세계문화유산이 굉장히 많은데, 7대 사찰과 9대 선원도 이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한지 등재를 진행 중이지요. 역사가 없다면 어느 날 갑자기 멋진 문화가 튀어나올 수 없습니다. 국보와 보물도 중요하지만, 마을 입구의 성황당과 당산나무 한 그루도 의미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리랑’과 같은 무형유산까지 우리가 귀하게 생각하고 보존해야 하는데, 국가가 다 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하기 어려운 섬세한 부분은 우리 국민이 나서서 동참하고 지키면서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 김 이사장은 2009년부터 무보수로 이곳을 이끌고 있으며, 회원 가입 권유에 열정적이다. 한 달에 1만원씩 기부하는 문화유산국민신탁의 회원은 최근 1만7000명을 달성했다. ‘만원의 행복’이다. 지난해 10월 회원을 위한 덕수궁 음악회 때는 1만6000명이었는데, 올해 목표를 조기 달성한 것. 김 이사장의 회원 가입 열정이 어찌나 뜨거운지, 일본 전 총리 무라야마 도이미치도 가입시켰을 정도다. 김 이사장과 중명전에서 커피 한잔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먼저 회원 가입부터 해야 할 것. 그는 회원들의 고마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매년 10월에 회원만을 위한 덕수궁 음악회를 갖는다. 코로나19로 인해 잠시 쉰 적이 있지만, 올해는 10회를 맞아 팝페라 가수 임형주가 특별 출연해서 덕수궁의 가을 밤을 빛내줄 것이다.
역사의 시시비비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울릉도 역사문화체험센터 방문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 1호로 매입해 관리하고 있는 시인 이상의 옛 집.
김종규 이사장의 사무실은 덕수궁 중명전이다. 10년 전부터 이곳을 본거지로 삼았는데, 역사의 현장인 곳에서 근무하면서 좋은 기운을 느끼고 있다. 1층은 을사늑약과 헤이그 열사 파견과 같은 대한제국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장이고, 2층은 그의 사무실이다. “이곳은 경운궁에 불이 났을 때 고종이 잠시 머물렀으며,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일본에서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가 사용하기도 했지요. 건물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맡아 이국적입니다.” 김종규 이사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쁜 명사 중 한 사람이다.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외에 삼성출판박물관 관장,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어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연일 이어진다. 이 모든 업무는 문화유산 관리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전에 삼성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우리 문화의 중요성을 절감했으며, 삼성출판박물관도 유산의 중요성을 알기에 설립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하며 우리나라에 머문 아사카와 다쿠미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다룬 저서를 여러 권 남겼는데, <조선의 선반>에서는 동양에서 조선 목가구가 으뜸이라고 예찬했습니다. 조선의 목가구는 만든 사람이 아니라 사용자가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지요.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를 생각해보세요. 뒤주와 찬장을 매일 동백기름으로 닦고 손질하시던 모습을요. 그렇게 애지중지하셨으니 가구가 몇백 년이 되었어도 아름다운 색을 내지요. 사용자가 완성자라는 것이 백 번 맞는 말이지요.” 21세기의 국민이 바로 문화유산의 완성자인 것이다. 문화유산 지정은 국가유산청이 주도적으로 선정하는 것이지만, 사실 모든 문화는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부산 문화공감 수정은 1939년 지은 일본식 2층 목조 건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도와달라고 해서 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을 맡게 되었는데, 인생의 마무리를 문화유산 지킴이로 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간 내가 몸 담았던 출판사, 박물관 등도 모두 포괄적으로 문화유산이지요. 함께하는 회원이 1만7000명이 되었으니 보람이 크고, 앞으로 회원 2만 명이 되는 날을 기대해봅니다. 내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이기 때문에 요새는 후임자를 찾고 있어요. 앞으로 좋은 후임자를 만나서 영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아직은 내가 건강하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해야지요.”
<메종 투 메종 2024: 모르는 한국>에는 정동 근대 건축물 도슨트 투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다. 조선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덕수궁 선원전 터, 외국 귀빈을 맞는 덕수궁 돈덕전, 한국 개신교 최초의 교회 정동 제일교회 그리고 운 좋으면 김종규 이사장을 만날 수도 있는 덕수궁 중명전 등의 코스다. 김 이사장은 <모르는 한국> 개최에 크게 감탄했고, 응원의 박수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