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색을 찾아내고 화염으로 그림을 그리는 도예가 김시영.
불과의 하모니에서 탄생한 그의 조각에는 작게 응축한 우주가 담겨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날, 강원도에 위치한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작은 마을처럼 형성된 작업실 한쪽에 마련된 차실로 나를 안내했다.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눠요. 찻잔을 기울일 때마다 빛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일렁이는 색깔을 한번 보세요.” 제각기 독특한 검은 빛을 띤 다완에 고운 녹빛 말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은 불과 흑자에 대한 깊은 매혹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득하네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불에 처음 매료된 시점부터 시작해볼게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바라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용산 공업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금속재료학과를 공부했어요.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장면 중 하나가 작은 용광로에서 끓인 쇳물을 부어 물성이 변화하는 모습이에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불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게.” 김시영 작가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 경험은 대학에서 금속재료를, 대학원에서 세라믹을 전공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공학적 접근에서 예술적 접근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연히 이천의 세라믹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경험을 살려, 1990년 자신의 고향인 가평에 첫 가마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김시영의 작업에서 흑자는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양한 광물질이 함유된 흙을 사용하여 고온에서 오랜 시간 구워 흑자의 독특한 색감과 질감을 표현한다. 흑자는 통일신라 말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 활용도가 낮아 점차 그 맥이 끊겼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희소성이 높은 흑자를 천목(天目)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겨왔다. 작가는 이러한 흑자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빛깔과 형태를 찾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그의 흑자 작업은 적합한 흙을 찾는 데서 출발한다. 가평, 홍천, 철원, 제주 등 전국 각지의 흙을 채취하고 조합하여 태토와 유약으로 만들고, 각각의 흙의 지질적 특성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가평의 잣나무 숲 아래 부엽토를 활용한 ‘서가 흑자’는 독창적인 색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그렇게 흙 속에 숨겨진 광물질이 불을 통해 저마다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백자는 흙에 있는 모든 광물질들을 제거한 뒤 사용하죠. 그런데 저는 불 자체에 매료되어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불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흑자의 가능성을 보고 처음부터 흑자 작업을 택한 거예요. 흑자가 가진 자연 그대로의 색, 총천연색을 유심히 보기 바랍니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 요소인 불은 흙으로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언젠가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색이 나오는 것을 보고 불의 신비로움에 확신을 가졌다며 말을 꺼냈다. “색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그때 뭔가 제가 단서를 잡았나 봐요. 불에 의해서 나왔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마치 산타클로스가 가마의 굴뚝으로 들어가 놓고 간 줄 알았어요. 정말로요.” 김시영 작가의 가마 안에서는 매일같이 작은 빅뱅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이다. ‘우주’, ‘행성’ 같은 키워드를 사용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가마를 통해 새로운 형태와 색을 창조하는 과정을 우주의 축소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수억 년 동안 지구에 먼지가 쌓이고 압축되고 또 혜성이 와서 부딪히고 깨지면서 지역마다 흙 성분이 다 다르게 된 거잖아요. 저는 그런 과정을 작은 가마 안에 재현해 새로운 형태와 색을 탄생시키는 것을 하나의 응축된 우주로 보고 있습니다.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외계인이 나중에 제 작품을 볼지 모른다는 상상도 해요.(웃음)”
그의 흑자는 단순한 검은색이 아닌 깊고 검은 공간감 위에 찬란한 색을 띤다. 이를 ‘구조색’이라고 하는데, 표면 물질의 미세한 구조에 의해 빛의 반사와 간섭으로 만들어지는 색을 뜻한다. “화학적 색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공작의 꼬리, 비눗방울, 빗물이 고인 웅덩이 같은 것이 모두 구조색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작업은 쉽게 형용할 수 없는 색, 예를 들어 푸르스름하면서도 불그스름한 듯한 오묘한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요변 현상은 형태의 변형이다. 약 1350~1450℃의 높은 고온 가마 속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변형에서 영감을 얻으며, 물레성형 외에도 캐스팅과 직조 등 다양한 성형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실용적 용기 형태에서 벗어난 조각적 작업을 이어간다. 이것이 바로 행성 메타포 작업이다. 달항아리의 은유적 버전이자 무정형에 가까운 추상 조각 작품인 행성 메타포는 불에서 녹아 내리며 일그러진 형태에 인간의 신체를 결합한 것이다. “상온에서 만들어지는 조각들은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계획하에 행해진 거잖아요. 하지만 웬만한 것도 전부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불 속에서는 제가 원하는 흐드러짐의 정도를 잘 조절해 멈추고, 마무리는 불이 조각한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제 작업은 추상적인 요변의 자연 조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작가의 의도도 들어갔지만, 불과의 하모니에서 탄생한 조각인 거죠. 이러한 불확실성이 인생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의 인생도 불확실성 그 자체죠. 그래서 불 속에서 탄생하는 불확실성이라는 형태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해보고자 한 작업이에요.” 김시영 작가가 말했다. 작은 흑자 다완으로 시작해 달항아리, 무정형의 인체 조각으로까지 진화를 거듭한 그의 작업은 한 번 더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도자기를 굽기 위해 쓰이는 붕판(탄화규소 SIC 캔버스) 자체에 유약을 발라 화염으로 그림을 그리며 물성 자체를 실험한 것을 발판 삼아 흙과 광물질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작업을 할 예정. “여태껏 하나의 피조물을 창조해냈다면 앞으로는 가마 자체가 작업이 될 거예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특정 지역의 흙으로 만든 가마를 만들 예정이에요.” 흙의 비밀과 새로운 영역을 계속해서 탐구하는 김시영 도예가. 그의 작업은 단순한 도예를 넘어 불과 흙, 그리고 우주로의 여행을 떠나게 한다. 언젠가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가마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 김시영 도예가가 부단한 실험을 거쳐 만들어낸 불의 조각임을 기억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