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정도 시간 동안 바젤을 완벽하게 들여다보기는 어렵다. 285개 갤러리 부스와 언리미티드, 파꾸르, 캐비닛, 토크, 필름 등의 프로그램까지 모두 둘러본다는 것은 미션 임파서블이다. 더군다나 아트 페어가 행사장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바젤 시내의 미술관과 갤러리는 일제히 대형 전시를 개최하며,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전시는 페어 기간에 배치한다. 바젤은 독일, 프랑스와 국경을 나란히 하는 만큼, 독일 비트라미술관은 바젤을 찾는 관람객이라면 꼭 한번 방문하는 머스트 비지트 플레이스다. 올해 비트라는 <트랜스폼 Transform! Designing the Future of Energy>와 <사이언스 픽션 디자인 Science Fiction Design>으로 두 개의 전시를 개최했다.
아프리칸 작가 전시가 열리고 있기에 서두에 언급한 쿤스트뮤지엄 바젤, 쿤스트할레 바젤뿐 아니라 필수적으로 방문해야 할 바젤의 미술관이 많다. 먼저 파운데이션 바이엘러의 그룹전은 미술관에 대한 고정관념에 혁신을 일으킨 전시를 선보인다. 샘 켈러 관장은 8명의 큐레이터와 기획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전시를 선보였다. 전시 제목이 매일 바뀌고, 작품이 옮겨 다닌다. 처음에는 불이 난 줄 알았다. 필립 파레노의 작품 <멤브레인>과 함께 후지코 나카야의 물안개 작품이 10분마다 한 번씩 정원을 가득 메우기 때문이다. 그 안에 들어가면 어안이 벙벙하다. 작품을 들고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더군다나 그 그림들이 고흐의 것이라니!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작가 구정아의 작품이 모네 그리고 마크 로스코와 함께 걸려 있어 탄성을 자아낸다.(8월 11일까지)
이전해서 재개관한 쿤스트하우스 바젤랜드 Kunsthaus Baselland에서는 그룹전 <리와일딩 Rewilding: Opening exhibition of the new Kunsthaus Baselland at Dreispitz>이 열리고 있다. 21세기의 기후 문제와 사회 변화에 직면한 자연과 생명체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8월 18일까지) 뮤지엄 팅글리 Museum Tinguely에서는 키네틱 아티스트 장 팅글리의 상설 전시와 과도한 상품 생산의 부조리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주는 미카 로튼버그 Mika Rottenberg의 개인전 <아니메터 팩토리 Antimatter Factory>가 열리고 있다.(11월 3일까지) 바젤은 라인강과 공원의 도시이기도 하다. 라인강을 수영해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있을 정도며, 날씨 좋은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수영복을 입고 강변에 앉아 일광욕을 한다. 하지만 이번 아트 바젤 기간에는 비 때문에 강물이 불어나서 그런 낭만적인 풍경은 보지 못해 아쉽다. 내년 아트 바젤을 방문하는 이들은 수영복을 꼭 준비하기 바란다. 아트 페어만 보기에는 바젤이 너무 아름답다.
INTERVIEW 미술가 김민정과의 만남
생 폴 드방스의 사색
이번 아트 바젤에서 가장 돋보인 한국 미술가는 김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언리미티드’ ‘갤러리즈’ 섹터에서 사색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언리미티드’는 오직 아트 바젤에만 있다. 엄격한 심사를 거친 스타 작가 70명의 초대형 작품을 선보이는 섹터다. 아트 바젤에서 가장 화려한 전시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양화에 기반을 둔 김민정 작가의 작품을 두 섹터에서 선보인다고 하자 페어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대를 모았고, 마침내 공개된 그의 작품은 미술 애호가를 감탄하게 만들었다. 김 작가는 한지를 향으로 태우는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번 페어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 기법을 이용한 신작 <트레이스 Traces>를 선보였다. 거대하고 화려한 작품들 사이에서 조용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신작은 관람객들을 매료시켰다.
<트레이스>는 8m 길이의 수묵화 <산 Mountain>을 중앙에 두고, 양 옆의 벽에 <타임리스 Timeless> 두 점을 배치한 작품. <산> 연작은 제목 그대로 먹으로 그린 풍경화인데, 그는 처음 물결치는 파도 소리를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으나, 막상 완성된 그림을 보니 어린 시절 고향 광주에서 보던 산이 떠올라 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타임리스>는 <산> 작업을 자른 후 가장자리를 불로 태우고 배열한 연작이다. 관람객들은 지문이 없어질 정도의 섬세한 작업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놀라워했다. ‘갤러리즈’는 각국의 대표 갤러리들이 대표 작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섹터다. 김 작가는 갤러리 현대와 함께 참여해 동양 정신을 담은 새로운 조형 작품을 선보였다.
아트 바젤의 두 섹터에서 호평을 받은 소감이 어떠한가? 작품을 준비하면서 잔뜩 긴장한 바람에 건강이 염려되었는데,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숨 돌렸다. 작품의 재료인 한지는 습도에 민감하다. 유럽의 높은 습도 때문에 원래는 한국에 가서 작품을 제작하려고 했는데, 최근 3년 정도 작업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컨디션이 좋지 못해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생 폴 드방스 작업실에 가습기를 8개 놓고, 뜨거운 히터도 틀고 습도를 30%에 맞추어 완성했다.
한지 작업이 그렇게 까다로운 줄 몰랐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해달라. 내 그림은 종이가 결정한다. 이에 한지를 섬긴다고 표현한다. 한지는 살아 있고 움직인다. 우리나라 닥나무는 추운 환경에서 자라서 견고하고 사납다. 한지는 갑옷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한국인 기질과 비슷한 것 같다. 예전에는 장인이 한지를 만들었는데, 요즘은 그런 종이는 구하기조차 어렵다. 매년 50~100kg 정도의 한지를 인사동 ‘백제한지’에서 프랑스로 배달시키고 있다.
영적인 상태를 만들기 위해 명상과 요가를 통한 훈련을 항상 한다고 들었다. 요가와 명상은 이미 나와 한 몸이 되었다. 정신적 해탈에 이르렀고, 이제는 작업을 안 할 때에도 마음이 평안하다. 그간 힘든 일도 많이 겪었고, 사실 인생이 너무 길다. 그래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는 이 작품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항상 건강했지만, 이제는 보신해야 할 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몸을 만든다고 하는데, 지금은 몸을 보신해야 정신도 맑아진다.
작업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스케치 없이 그림을 그린다. 내 작품을 평가하는 나의 지적인 감각을 항상 의심한다. 그래서 망쳤다고 생각한 그림이라도 몇 년씩 그냥 둔다. <타임리스>는 10년간 보관해오던 <산>을 태우고 잘라서 만든 작품이다.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라도 버리지 않고, 생각나면 꺼내서 과거의 냄새를 맡는다. 내가 죽으면 작품이 남는다. 배설물이 거름이 되듯이, 내 과거가 현재를 이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 일맥상통하다. 많은 재료가 있지만 나는 종이를 택했고, 한 재료로 깊이 들어가 실패하더라도 일단 해보는 것이다.
프랑스 남부 생 폴 드방스 Saint Paul de Vence에 작업실이 있다고 들었다. 하루 일과가 궁금하다. 아침 6시 정도 일어나서 정원에 가서 호흡을 하고
스트레칭도 한다. 산도 보고 키우는 닭도 보고, 산책을 한다. 점심 식사는 내가 직접 만든다. 어시스턴트들이 맛있게 먹으면, 그림 판 것보다 더 행복하다.(웃음) 이것이 바로 보시다. 그리고 바로 작업을 시작하거나, 일하기 싫어도 작업실에 있는다. 작업실에서 예전에 망쳤다고 생각한 작품을 꺼내 보기도 하고, 시간을 낭비하곤 한다. 사실 작가에게는 낭비란 없다. 예술은 노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놀지 않으면 예술가가 아니다. 알렉산더 칼더, 루치오 폰타나, 백남준의 공통점은 놀았다는 것이다. 창작의 고통이 있었기에, 놀이하듯 작품이 만들어졌다. 때로는 예술은 신이 만들고, 예술가가 신의 사제가 아닌가 생각해본다. 사제는 신과 인간의 중심에 있다. 예전에는 보살이 중생을 구제했지만, 이제는 예술가가 그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얼마 전 프랑스 알민 래쉬 갤러리와 멕시코 노덴하케 갤러리의 개인전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1월에 열리는 매그 파운데이션 개인전도 기대가 크다. 매그 파운데이션은 작업실이 있는 생 폴 드방스에 있는 유서 깊은 미술관이다. 최근 리노베이션이 끝났는데, 내 전시가 새로운 공간에서 처음 열리는 것이라 여러모로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200×140cm 크기의 <산> 연작을 14점 선보일 예정이다. 그동안 전시 공간이 너무 크면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 ‘언리미티드’를 통해 8m가 넘는 큰 작업은 처음 해보았는데, 관람객의 반응이 좋아서 용기를 얻었다. <산> 연작은 동양화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일필휘지의 기법이 필요해서 그간 이렇게 큰 작품을 선보인 적이 없었는데 앞으로 더 큰 작품도 할 수 있다고 본다. 작품 영역을 더 넓힐 수 있겠다 싶다.
생 폴 드방스에서 작업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작품 세계에 생 폴 드방스와 고향 광주의 영향이 있을까? 물론이다. 생 폴 드방스는 샤갈이 살았던 동네다. 지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매료되어 주택을 구입하게 됐다. 광주는 유배지로 꼿꼿하고 똑똑한 사람들의 후손이 많다. 천경자 작가도 광주 출생이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천경자가 선배라는 데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천 작가가 과거에 “시간이 없어서 1층에서 도시락을 싸서 2층 작업실로 올라간다”고 말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작가로서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 많지 않다. 죽기 전에 좋은 작품을 더 많이 만들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앞으로 더 깊은 시골로 이사 갈 예정이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천명(天命)이고, 작가가 내 천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