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ssion for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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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정리나 푸드디렉터.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음식을 대하는 그의 근황 이야기를 들었다.

거실에서 바라본 다이닝 전경. 하태임 작가의 작품(Un Passage)이 공간에 생동감을 더한다.

화강암 상판이 돋보이는 다이닝 테이블과 소파는 박스터, 의자는 아티작에서 커스텀 제작, 샹들리에 조명은 스페인 마리너 제품.

그 누구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정리나 디렉터.

요즘 굉장히 바쁘게 지내신다고 들었어요. 이사도 하고, 늘 해오던 컨설팅과 행사도 진행하고, 지난 6월에는 정관 스님, 파브리 셰프와 함께 한국-이탈리아 140주년 공식 만찬 총괄 디렉팅도 담당했어요. 그리고 비놀로지라는 와인 다이닝을 운영하면서 새로운 요리책 작업도 하고 있고요. 평소에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영감받기 위해 정말 많이 돌아다니긴 해요. 새로운 레스토랑이나 디저트 가게가 문을 열면 바로 달려가는 편이에요.

‘푸드디렉터’라는 직함이 누군가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업무를 하나요? 그래요. 많이 헷갈려 하시는데, 저는 스스로 셰프나 스타일리스트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려요. 제가 하는 가장 대표적인 일은 럭셔리 브랜드 플래그십 스토어의 식음료 컨설팅과 대행 운영을 하는 업무예요. 브랜드 VVIP를 대상으로 여는  사의 전반적인 기획자이자 총괄 디렉팅 역할을 하는 거죠. 미쉐린 스타 셰프와 함께 메뉴 개발도 하고 서비스 디자인도 하고, 스타일링 컨셉트를 잡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약 30명의 셰프들과 협업을 했어요. 그 외에 오설록, 올리타리아, 해녀의 부엌 같은 식음료 브랜드의 메뉴나 스타일링 컨설팅도 꾸준히 해왔죠.

많은 사람과 함께 일하고 조율하는 업무가 대부분이겠어요. 주로 설득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브랜드나 셰프에게 이런 컨셉트로 해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거죠. 브랜드가 원하는 정확한 포인트를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셰프들 사이에서 스타일링이나 플레이팅 같은 사소한 것을 다 조율해야 돼요.

집 안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주방. 주방 가구는 아크리니아, 벽에 걸린 그림은 에밀리영 작가 작품.

하루 중 반려묘 나코, 민트와 보내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

조만간 테라스에 작은 텃밭을 꾸밀 예정이라고.

무엇보다 LG 사(현 LX인터내셔널) HR 인재육성팀에서 7년간 근무한 이력이 눈에 띄었어요. 기업에서 교육하는 팀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기업과 팀에서 요구하는 교육의 커리큘럼을 짜고 자료를 만드는 전반적인 업무였어요. 먼저 각 사업부의 교육 니즈를 파악하고 레벨을 파악한 다음 그에 부합하는 강사들을 찾는 거죠. 그런 뒤에는 강사와 함께 우리가 원하는 교육 콘텐츠 내용을 조율하고 함께 만들었어요. 사내 행사 진행이나 기획 같은 것도 했고요.

어떻게 보면 지금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식음료 업계로 어떻게 넘어오게 된 거예요? 당시 자회사에 와인 수입사가 있었어요. 제가 근무하던 빌딩 지하에 있었는데, 그곳을 방앗간 드나들 듯 다녔어요. 취미로 시작한 와인이었는데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되면서 식음료 업계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사실 프랜차이즈 김밥집을 하고 싶었어요.(웃음) 일단 퇴사하고서 뒤늦게 요리 관련 학교와 수업을 듣기 시작했어요. 제가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닌 터라 다소 늦은 나이에 완전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한 거죠. 르 코르동 블루 요리학교부터 나카무라 아카데미 제빵 과정, 궁중연구원까지 수료했어요. 당시 제가 가장 잘하는 게 교재 만드는 일이라 용감하게 책을 먼저 낸 거죠.

그 요리책이 2018년 시공사에서 출판한 <eat! At home: 오늘, 양식하다>군요. 무려 3쇄까지 하고 대만에 판권까지 수출했던데요. 직장인 니즈에 맞춰 손쉽게 그럴싸한 양식을 만드는 레시피북이에요. 당시 한 10곳의 출판사에 기획서를 냈지만 유일하게 받아준 곳이 시공사였어요. 한 번도 제 기획서가 떨어진 적이 없었는데 만만치 않은 현실에 좌절도 많이 했죠. 지금 같으면 스타일링도 어느 정도 하는데, 그때는 쉽지가 않았어요. 레퍼런스로 도나 헤이 같은 책을 사서 참고하고, 러프한 스타일링을 한다고 제주도에서 철판을 공수해오고… 정말 혼자서 열심히 만든 기억이 나네요.

부라타 치즈와 사과, 방풍나물, 들기름을 활용해 간단한 와인 안주를 만들었다.

평소 다양한 와인을 즐겨 마시지만 특히 뵈브 클리코 샴페인을 좋아한다.

요즘 조성희 작가 기물에 유독 눈길이 간다는 정리나 디렉터.

본격적으로 이쪽 업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계기가 됐겠어요. 당시 네이버가 블로그 중심에서 영상으로 바꾸면서 온라인 교육 콘텐츠에 대한 니즈가 있었어요. 영상으로 잘 설명해줄 요리 선생님이 필요했는데, 기존 선생님들이 대부분 안 하겠다고 하셨나 봐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거기서 제가 손을 들었어요. 요리 콘텐츠를 매주 한 가지씩 3년 동안 연재했어요. 댓글이 실시간으로 달리는데, 익명이라 굉장히 신랄해요. 그 덕분에 실력이 많이 향상됐죠. 그 이후로 식품 브랜드에서 레시피 개발이나 스타일링 작업 문의가 들어왔어요. 작업을 하면서 책도 두 권 더 냈고요.

지금 주로 담당하는 럭셔리 브랜드 분야는 사실 또 다른 영역이잖아요. 제가 다소 늦은 나이에 르 코르동 블루에 들어간 터라 정말 열심히 배웠는데, 당시 총괄 매니저님이 그 모습을 기특하게 봐준 것 같아요. 청담동 명품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케이터링 이슈가 좀 많았는데, 키친이 없다 보니 늘 호텔에서 공수해오는 구조였어요. 아무래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 컨설팅 의뢰가 들어오면 저에게 연결해준 거죠. 매장에 간이 주방을 만들고 수셰프와 소믈리에 팀을 만드는 방식을 제안하다가 나중에는 대행 운영까지 맡게 됐어요. 그게 벌써 5년도 더 됐네요. 연말 행사부터 자잘한 행사까지 늘 일이 많았어요. 그 덕분에 셰프, 파티시에, 소믈리에 등 많은 분들과 작업할 수 있어서 행복했죠.

바쁜 와중에 와인 다이닝 비놀로지도 오픈했는데. 다양한 일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중적인 일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와인을 워낙 좋아하니 캐주얼한 안주와 가볍게 페어링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했어요. 경계 없는 무국적 다이닝에 가까워요. 젊은 셰프들이랑 함께 으쌰으쌰 하면서 만들어 나가는 중이죠.

다채로운 와인과 무국적 다이닝 메뉴를 즐길 수 있는 청담동 비놀로지 모습.

아늑한 분위기의 침실 전경. 정면에 보이는 작품은 도도새를 테마로 도시인의 모습을 그려내는 김선우 작가 작품. 낙찰금 전액은 야생동물 보호단체 WWF에 기부됐다.

최근 청담동으로 이사했는데요. 에테르노 청담은 국내 최고가 아파트로 화제가 된 곳이잖아요. 운이 좋게도 마지막 남은 세대를 분양 받았어요. 아직 3분의 2 정도만 입주했고 3분의 1 세대는 내부 인테리어를 하고 있어요. 화제가 된 탓에 지인들이 초대해달라고 하는 단점이 있어요.(웃음) 저는 재택 근무를 많이 하는 편인데, 회의실이나 공용 공간이 잘 돼 있어서 많이 활용하고 있어요.

공간 소개를 부탁드려요. 구조 변경도 하셨다고요. 이 집은 저와 남편, 고양이 나코, 민트가 살 집이라 방이 4개까지 필요 없었어요. 중간 방을 하나 터서 거실과 복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해  간이 좀 더 넓어 보이도록 만들었어요. 거실 한쪽에는 TV 대신에 벽난로를 설치했고요. 방 하나는 서재, 하나는 침실, 나머지 하나는 게스트룸으로 꾸몄어요. 전반적으로 미니멀한 취향이라서 가구가 많지 않아요.

현관에서 바라본 모습. 푸른 사슴은 고상우 작가 작품.

고양이를 형상화한 백호와 손우정 작가의 자신을 투영한 작품.

입주 전 모든 자재와 액세서리를 선택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욕실.

집 안 곳곳에 작품이 굉장히 많네요. 사실 작품을 한창 많이 모으던 적이 있는데, 서울 옥션 매거진 1호에 영 컬렉터로 소개되기도 했어요. 저는 주로 하태임 작가부터 에밀리영, 문형태, 윤위동, 김선우, 박지혜 작가 등 1970~80년대생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컬렉팅하는 편이에요. 이 작가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함께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거든요. 또래다 보니 친분이 생겨서 종종 만나기도 해요.

보통 주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 같아요. 보통 서재 아니면 주방이에요. 주방은 메뉴 개발을 위해서 셰프, 파티시에들과 테스트하는 사무 공간이 되기도 하고, 프로젝트가 끝나면 감사한 분들을 초대해 직접 요리해주기도 하죠. 보통 모일 때 한 가지 컨셉트로 요리해요. 조만간 아트 분야 사람들과 작가들이 함께 올 예정인데 ‘화가의 식탁’을 컨셉트로 해서 모네가 즐겨 먹던 코코뱅, 잭슨 폴락의 양송이 스파게티, 피카소의 오믈렛 등을 준비하려고 해요. 재밌고 오래도록 기억될 메뉴일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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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포토그래퍼

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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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파빌리온의 작가들

여름 파빌리온의 작가들

여름 파빌리온의 작가들

매해 런던의 여름이 기다려지는 이유, 바로 서펀타인 갤러리의 파빌리온 때문이다.

티에스터 게이츠, 서펀타인 파빌리온. photo Gene Pittman © Walker Art Center, Mionneapolice

영국 런던 켄싱턴 가든에 있는 서펀타인 갤러리는 훌륭한 전시 외에도 매해 여름 건축가를 초청해 진행하는 여름 파빌리온으로 유명하다. 2000년 자하 하디드를 초청하여 일회성 프로젝트로 시작한 후원의 밤 모임이 2024년까지 이어지는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도 알 만한 건축가의 이름을 읊어보자면, 렘 쿨하스, 프랭크 게리, 장 누벨, 피터 줌토르, 헤르조그 드 뫼롱 등이 있다. 건축가뿐 아니라 아티스트에게도 열려 있어 올라퍼 엘리아슨, 아이 웨이웨이, 티에스터 게이츠 등도 참여했다. 2024년 파빌리온의 이슈는 처음으로 한국의 건축가 조민석이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미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에서 황금사자상 받은 것을 비롯해 국제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서펀타인 파빌리온을 기점으로 그의 이름을 좀 더 대중적으로 세계에 알리게 된 셈이다.

조민석(매스 스튜디오), 서펀타인 파빌리온. photo Iwan Baan © Serpentine

photo Iwan Baan © Serpentine

‘아키펠라직 보이드 Archipelagic Void’라는 이름의 파빌리온은 ‘마당’을 상징하는 중앙의 원형 공간에서 별 모양으로 뻗어나가는 다섯 개의 건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공간은 강당, 도서관, 갤러리, 티하우스, 플레이타워의 역할을 맡는다. 파빌리온은 지난 6월 7일 개관하여 오는 10월 23일까지 진행할 계획인데, 올가을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에 방문한다면 서펀타인 갤러리를 방문해 전시와 함께 파빌리온 건축도 즐기면 좋겠다. 한국에는 조민석 건축가의 작품이 꽤 많은데, 그중 창경궁 근처 원남교당을 가장 추천하고 싶다. 종교 건축물이면서도 모두에게 열려 있는 영적인 아우라가 서려 있다. 그의 아버지가 여의도 순복음교회를 지은 조행우 건축가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부자가 각기 다른 유명 종교 건축물을 지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모리미술관, <티에스터 게이츠: 아프로 밍게이> 전시 장면. © Mori Art Museum, artist

한편 2022년 파빌리온의 선정 작가인 미국 예술가 티에스터 게이츠의 대규모 개인전이 가까운 일본의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진행 중이다. 시카고에 기반을 둔 흑인 작가로 서펀타인 파빌리온에서도 흑인 이민자의 역사와 도예, 다도, 명상 등의 프로그램을 ‘블랙 채플’로 표현한 바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흑인의 역사를 문화와 연결시킨 점이 포인트다. 블랙 채플이 런던 내 유명한 미술관 ‘화이트 채플’과의 대조점이라면, 이번 전시에서 제안한 ‘아프로-밍게이 Afro-Mingei’는 미술에 대한 대척점으로 ‘민예(밍게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밍게이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평론가 제창한 용어인데, 한편으로 공예라는 이름으로 통칭된다. 그러나 공예와 달리 민예는 생활 속에서 무명의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쓰였으며, 민중들의 삶의 지혜를 담고 있다. 이를 작가는 미국 시민권 운동의 정신인 ‘흑인은 아름답다’ 프로파간다와 연결시킨다. 흔히 고급미술로 여기는 회화와 조각에 반해, 소홀이 여기며 제대로 된 예술로 취급받지 못한 민속용품과 사회에서 가장 하류층에 속한 흑인의 삶을 공통점으로 본 것이다. 티에스터 게이츠는 2004년 일본 도예마을 도코나메에서 직접 도예 수업을 받으며 일본의 문화와 도자 예술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이번 전시를 풍성하게 하는 요소가 되었다. 전시는 9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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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애(이안아트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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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예술가

불의 예술가

불의 예술가

흙에서 색을 찾아내고 화염으로 그림을 그리는 도예가 김시영.
불과의 하모니에서 탄생한 그의 조각에는 작게 응축한 우주가 담겨 있다.

기름 가마 ‘베가 Vrga’에서 구워지고 있는 행성 메타포 시리즈. 성형 시 각진 형상들은 1350℃ 이상의 불길 속에서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고온과 고압을 통해 부드러운 라인을 가지게 된다.

빛의 갤러리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은 행성 트래디셔널 시리즈.

달항아리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도예가 김시영의 모습.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날, 강원도에 위치한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는 작은 마을처럼 형성된 작업실 한쪽에 마련된 차실로 나를 안내했다. “차 마시며 이야기 나눠요. 찻잔을 기울일 때마다 빛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일렁이는 색깔을 한번 보세요.” 제각기 독특한 검은 빛을 띤 다완에 고운 녹빛 말차를 내어주며 말했다.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은 불과 흑자에 대한 깊은 매혹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득하네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불에 처음 매료된 시점부터 시작해볼게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바라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용산 공업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거기서 금속재료학과를 공부했어요. 아직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는 장면 중 하나가 작은 용광로에서 끓인 쇳물을 부어 물성이 변화하는 모습이에요. 그게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었어요. 그때부터인 것 같아요. 불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게.” 김시영 작가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이 경험은 대학에서 금속재료를, 대학원에서 세라믹을 전공하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결국 공학적 접근에서 예술적 접근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우연히 이천의 세라믹 공장에서 일하게 된 경험을 살려, 1990년 자신의 고향인 가평에 첫 가마터를 잡고 본격적으로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행성 트래디셔널과 행성 메타포 작업. 벽면에 걸린 작품은 도예가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아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딸인 김자인 작가의 필드 바이브레이션 페인팅 작품.

여러 지역의 흙을 사용해 만든 행성 플래닛과 행성 메타포 작업.

빛의 갤러리에 놓인 행성 메타포 시리즈.

강원도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만난 김시영 도예가.

김시영의 작업에서 흑자는 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양한 광물질이 함유된 흙을 사용하여 고온에서 오랜 시간 구워 흑자의 독특한 색감과 질감을 표현한다. 흑자는 통일신라 말기 시작되어 고려시대에 주로 만들어졌지만, 일상생활에서 활용도가 낮아 점차 그 맥이 끊겼다. 반면, 중국과 일본에서는 희소성이 높은 흑자를 천목(天目)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겨왔다. 작가는 이러한 흑자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에 주목하여 자신만의 독창적인 빛깔과 형태를 찾는 작업에 매진해왔다. 그의 흑자 작업은 적합한 흙을 찾는 데서 출발한다. 가평, 홍천, 철원, 제주 등 전국 각지의 흙을 채취하고 조합하여 태토와 유약으로 만들고, 각각의 흙의 지질적 특성을 연구한다. 예를 들어, 가평의 잣나무 숲 아래 부엽토를 활용한 ‘서가 흑자’는 독창적인 색을 만들어낸 작업이다. 그렇게 흙 속에 숨겨진 광물질이 불을 통해 저마다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작업 방식이다. “백자는 흙에 있는 모든 광물질들을 제거한 뒤 사용하죠. 그런데 저는 불 자체에 매료되어이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에, 오히려 불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는 흑자의 가능성을 보고 처음부터 흑자 작업을 택한 거예요. 흑자가 가진 자연 그대로의 색, 총천연색을 유심히 보기 바랍니다.” 그의 작업에서 핵심 요소인 불은 흙으로 단순히 물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힘과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다. 언젠가 예상치 못한 아름다운 색이 나오는 것을 보고 불의 신비로움에 확신을 가졌다며 말을 꺼냈다. “색이 정말 예쁘게 나왔어요. 그때 뭔가 제가 단서를 잡았나 봐요. 불에 의해서 나왔다는 게 처음엔 믿기지 않았어요. 마치 산타클로스가 가마의 굴뚝으로 들어가 놓고 간 줄 알았어요. 정말로요.” 김시영 작가의 가마 안에서는 매일같이 작은 빅뱅의 소용돌이가 일고 있는 것이다. ‘우주’, ‘행성’ 같은 키워드를 사용하는 이유 역시 자신의 가마를 통해 새로운 형태와 색을 창조하는 과정을 우주의 축소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수억 년 동안 지구에 먼지가 쌓이고 압축되고 또 혜성이 와서 부딪히고 깨지면서 지역마다 흙 성분이 다 다르게 된 거잖아요. 저는 그런 과정을 작은 가마 안에 재현해 새로운 형태와 색을 탄생시키는 것을 하나의 응축된 우주로 보고 있습니다. 엉뚱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외계인이 나중에 제 작품을 볼지 모른다는 상상도 해요.(웃음)”

김시영 도예가의 작은 차실. 벽면에 걸린 작품은 김자인 작가의 <아리데센스 레드 2>. 그 앞에 놓인 달항아리는 위, 아래 접붙이기 기법을 발전시켜 사선으로 접붙이기를 시도해본 작품이다.

다채로운 색을 지닌 다완은 행성 트래디셔널 B 시리즈.

성형 후 자연건조 중인 행성 트래디셔널 시리즈.

그의 흑자는 단순한 검은색이 아닌 깊고 검은 공간감 위에 찬란한 색을 띤다. 이를 ‘구조색’이라고 하는데, 표면 물질의 미세한 구조에 의해 빛의 반사와 간섭으로 만들어지는 색을 뜻한다. “화학적 색소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공작의 꼬리, 비눗방울, 빗물이 고인 웅덩이 같은 것이 모두 구조색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의 작업은 쉽게 형용할 수 없는 색, 예를 들어 푸르스름하면서도 불그스름한 듯한 오묘한 색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다른 요변 현상은 형태의 변형이다. 약 1350~1450℃의 높은 고온 가마 속에서 일어나는 예상치 못한 변형에서 영감을 얻으며, 물레성형 외에도 캐스팅과 직조 등 다양한 성형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실용적 용기 형태에서 벗어난 조각적 작업을 이어간다. 이것이 바로 행성 메타포 작업이다. 달항아리의 은유적 버전이자 무정형에 가까운 추상 조각 작품인 행성 메타포는 불에서 녹아 내리며 일그러진 형태에 인간의 신체를 결합한 것이다. “상온에서 만들어지는 조각들은 예술가의 머릿속에서 철저히 계획하에 행해진 거잖아요. 하지만 웬만한 것도 전부 엿가락처럼 휘어버리는 불 속에서는 제가 원하는 흐드러짐의 정도를 잘 조절해 멈추고, 마무리는 불이 조각한 거란 말이죠. 그래서 제 작업은 추상적인 요변의 자연 조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작가의 의도도 들어갔지만, 불과의 하모니에서 탄생한 조각인 거죠. 이러한 불확실성이 인생과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우리의 인생도 불확실성 그 자체죠. 그래서 불 속에서 탄생하는 불확실성이라는 형태를 조금 더 직접적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해보고자 한 작업이에요.” 김시영 작가가 말했다. 작은 흑자 다완으로 시작해 달항아리, 무정형의 인체 조각으로까지 진화를 거듭한 그의 작업은 한 번 더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도자기를 굽기 위해 쓰이는 붕판(탄화규소 SIC 캔버스) 자체에 유약을 발라 화염으로 그림을 그리며 물성 자체를 실험한 것을 발판 삼아 흙과 광물질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해주는 작업을 할 예정. “여태껏 하나의 피조물을 창조해냈다면 앞으로는 가마 자체가 작업이 될 거예요. 상상하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특정 지역의 흙으로 만든 가마를 만들 예정이에요.” 흙의 비밀과 새로운 영역을 계속해서 탐구하는 김시영 도예가. 그의 작업은 단순한 도예를 넘어 불과 흙, 그리고 우주로의 여행을 떠나게 한다. 언젠가 우두커니 서 있는 커다란 가마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 김시영 도예가가 부단한 실험을 거쳐 만들어낸 불의 조각임을 기억하기 바란다.

작업실 입구. 그 안에는 김시영 도예가가 만든 작은 마을이 존재한다.

다양한 곳에서 채취한 흙은 물성 연구를 위해 사용된다.

아름다운 붉은 빛깔을 입은 행성 트래디셔널 시리즈. 작가가 특히 애정하는 작품이다.

김시영 작가의 네 번째 장작 가마 ‘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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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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