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넘나들며 개성 강한 작업을 선보이는 안태원과 무나씨와의 만남.
뿌리, 안태원
그림, 입체, 영상, 애니메이션 등 여러 장르를 가리지 않고 작업하는 안태원 작가. 인터넷의 물질성을 주제로, 인터넷에서 빠르게 변화하고 확산되는 밈 Meme을 활용한 위트 넘치고 개성 강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P21에서 선보인 개인전의 제목 <뿌리 Puuri>는 작가의 인스타그램 계정명이기도 하다. 무슨 의미인가? 대학 입시 준비할 때, 같은 반 친구가 불러준 별명이다. 아주 독특한 친구였는데, 나무 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단순히 어감이 좋았던 것 같다. 이번 전시의 기획 단계에서 ‘뿌리’와 전시 주제를 연결 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케이블이 뿌리처럼 퍼져나가는 형상이나 에어브러시로 물감을 뿌리는 행위 등 내 작업 전반에서 볼 수 있는 ‘뿌리’들에 주목했다.
초기 작업부터 꾸준히 인터넷에 떠도는 밈 이미지를 적용하고 있다. 워낙 친구들과 실없는 농담 하는 걸 즐긴다. 그 순간을 이미지화한 것이 밈 같다. 앞뒤 맥락이 사라지고 그 순간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해 농담처럼 소비되는 현상이 재미있었다. 작업 자체에 무게감을 주려 하지 않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밈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야기가 조금씩 추가되었다.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고 새로 등장하는 행태의 중간을 딱 잡아서 현실에 멈춰두는 작업들이다.
그러면서 작업에 점차 반려묘 ‘히로’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히로는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밈을 그리던 중에 유명한 고양이 밈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히로를 만났다. 어미를 잃은 길고양이다. 히로를 키우면서 고양이 밈을 사용할 필요가 없겠더라. ‘히로를 밈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양이로 만들어보자’는 생각을 했다.
밈에 히로를 적용한 작품들이 보여주는 해체주의적이고 독특한 형태가 인상적이다. 고양이뿐만 아니라 밈에서 볼 수 있는 형태 같다. 후가공이 아닌 이미지도 밈이 되지만, 가공하는 이들이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담겨 과장되고 왜곡된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그러한 특징을 히로에게도 적용했다.
이번 작업에는 처음으로 얼굴이 등장한다. 원래 학창 시절부터 친구들 얼굴 그리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의 인상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지금처럼 에어브러시를 잡기 전에는 드로잉을 엄청 많이 했는데, 그때도 내 그림에는 공간이 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무언의 존재감을 그려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내 얼굴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들을 함께 그렸다. 평소 사람들을 많이 보며 마음속에 축적되어 있던, 스쳐 지나가는 인상과 기억을 버무려 손 가는 대로 인물의 인상을 구현했다.
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작업 과정은 정해져 있지 않다. 불현듯 떠오르는 잔상을 포착하려 한다. 무작위로 앨범 속 히로의 이미지를 디지털 툴로 편집해보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에스키스 (Esquisse, 밑그림)가 나오면 평면으로 옮길지, 입체적으로 구상할지 등 실물로 어떻게 옮길지 고민한다. 작업할 때는 눈앞에 보이는 재료를 과감하게 사용하는 편이다. 현재는 조각하는 친구들과 작업실을 같이 사용하다 보니, 그들의 재료들을 활용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어떤 부분을 시도했나? 이미지를 온전히 감싸지 않고 노출시키려 했다. 기존에는 입체 조각 재료로 조형을 해놓고, 그 위에 에어브러시로 여유 공간 없이 페인팅해 작업을 완성하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감싸는 이미지의 부분부분을 노출시켰다. 도구로 일부러 깎아낸 부분도 있고, 질감을 살려 마치 껍데기가 불규칙적으로 벗겨진 것 같은 느낌을 만들었다.
그 이유는? 완전한 결과물보다 불완전한 형태로 마감 짓고 싶었다. 아무래도 난 90년대생이다 보니 디지털 감수성이 풍부하다. 현실 사물을 보는 것만큼이나 디지털 이미지가 익숙하다 보니, 결과물 또한 디지털에서 편집한 듯한 이미지가 나온다. 그와 반대로 작업 과정에서는 아날로그적인, 열심히 몸을 쓰고 땀 흘리며 만들고 싶었다. 디지털 감수성이 담겨 있기 때문에 더욱 불완전한 형태로 구현한 것이다. 디지털상에서 편집 과정을 거친 작업을 현실로 옮겨 형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데, 조각을 파내는 공정 자체가 엄청 수고스럽다. 시간과 노동이 그 전 작업들보다 두세 배 더 힘을 들여야 한다.
작업 과정의 변화를 가지면서,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이 있다면? 원래 전공이 평면이다. 올해 상반기에는 조각을 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하반기에는 평면으로 다시 돌아갈 예정이다. 분기별로 계속 변화를 주려고 한다. 조각에 집중하는 시기가 있다면 그 다음은 평면을, 그리고 또다시 조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평면과 입체를 오가는 과정을 가지면 시야가 바뀐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있나? 조각 재료를 다루는 데 능숙하지 않다 보니 편집된 이미지를 현실의 조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그대로 복사는 안 되더라.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나의 해석이 들어가게 된다. 처음 평면을 작업할 때는 편집한 이미지를 마치 프린터기가 된 것처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 넣기 바빴다면, 조각을 하고 페인팅으로 돌아가니 조각 작업처럼 나만의 해석을 담게 되었다. 앞으로도 편집된 효과를 어떻게 해석해서 재현해볼지 더욱 고민하게 될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입체 조형에 히로를 씌운 첫 작업. 이번 전시장에 있는 모든 작업의 시작이 된 작품이다. 그 작품은 아쉽지만 판매해서 지금 갖고 있지 않다. 항상 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
최근 준비 중인 작업에 대해 소개해달라. 연말에는 마이애미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에 나가려고 한다. 그리고 내년에는 일본 디젤 갤러리와 영국 런던에서 개인전을 여는데 준비 중이다. 열심히 작업해야 하는 시점이다. (웃음) 국내보다 해외에서 반응이 더 좋다. 그래서 더 신기하다.
무나씨, 김대현
동양화를 전공했으며, ‘무나씨’라는 활동명으로 2009년부터 시리즈를 진행해오고 있는 김대현 작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변화와 성찰을 주목하며, 한지 위에 먹으로 담아낸 묵묵한 감정이 돋보인다.
무나씨라는 활동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일기처럼 글을 쓸 때 ‘나는’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많은 것이 싫더라. 나와 내가 아닌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무나’라 지었다. 불교 용어 ‘무아(無我)’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점도 있지만, 불교에서 이름을 가져왔다고 하면 무거운 느낌이 든다. 그런 출발은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이름이다.
존칭 표현인 ‘씨’가 붙은 이유도 궁금하다. ‘무나’라는 이름으로 에세이를 냈는데, 사람들이 ‘무나씨’라고 불러주는 순간 작가적인 자신감을 주더라. 그래서 작가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지와 먹을 사용하는 이유는? 동양화를 전공했기 때문에 익숙한 부분이 있다. 또한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자체가 매력적이다. 서양 물감은 지울 수도 있고, 덮을 수도 있다. 화면과 물감이 분리될 수 있는 요소를 붙여놓은 것이다. 하지만 먹은 종이 안에 스며들기 때문에 바꿀 수 없는, 되돌릴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또한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붓으로 획을 그을 때 아주 작은 떨림도 다 묻어난다. 매력인 동시에 어려운 부분이다.
반복적인 선 표현이나 세밀한 묘사도 특징이다. 작업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스케치는 컴퓨터상에서 그래픽으로 모두 만든다. 빛과 구도, 표정, 동작 등을 완성시킨 다음 캔버스에 그대로 옮긴다. 그림 그릴 때는 어떤 고민도 하고 싶지 않다. 작품에 컬러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케치가 끝나고 그림 그리기 시작해서는 선긋기와 색칠하기뿐이다. 스케치 전에는 글을 쓰고, 각 작품의 단서가 될 만한 문장이나 단어들을 나열하는 과정이 있다.
오랜 시간이 필요한 반복적인 작업을 선택한 이유는? 그리는 시간을 갖고 싶어서. 예전 그림은 한 면을 다 칠하면 끝나도록 선을 그렸다면, 이제는 작업이 빨리 끝나버린다는 아쉬움에 그런 작업을 원치 않는다. 그림과 시간을 오래 보내고 싶고, 오랜 시간을 담고 싶다. 그 과정이 사람들을 그림에 더 머물 수 있게 만드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미술관보다 박물관 가는 걸 좋아하는데, 돌에 새겨 넣은 작품들을 보면 시간이 느껴지는 것이 좋다. 그림에 있어서 나 역시 그런 시간을 담고 싶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보면 따스한 질감이 다가온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듯하다. 주제적인 면에서 작품 속 인물 간의 따스한 느낌이 전달될 수도 있는 것이고, 겹쳐진 선들이 천의 질감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노란빛을 띠는 것은 오리나무 열매를 끓여 우려낸 물로 작업 마지막에 염색을 하기 때문이다. 미색 종이에 좀 더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을 주고자 동양화에서 사용하는 기법이다. 이 또한 새것 같은 느낌을 주고 싶지 않은, 시간성을 담고자 한 이유에서다.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한 이유가 궁금하다. 처음 그림 그릴 때, 내가 잘 아는 것을 그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 졸업할 때도 다짐한 것이 ‘내 어머니나 조카들이 봐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였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나와 내 주위의 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가장 현실적이고 실감나는 주제였다. 또한 사람이 등장하는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편안하다. 국적, 나이, 성별을 떠나서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어떤 것을 그리든 자신만의 감정을 이입해볼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주제를 정하게 되었다.
무나씨만의 오묘하고 중성적인 캐릭터는 처음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나? 가벼운 낙서로 그리게 된 얼굴이다. 원형적인 사람의 형상을 그리고 싶었다. 성별과 나이, 선하고 악한 캐릭터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했다. 지금은 인물의 포즈나 장면에 좀 더 신경 쓴다. 마치 머릿속에서 인형극을 하듯 이리저리 인물들을 배치해보며 그린다.
눈을 감은 듯한, 생각에 잠긴 표정도 인상적이다. 캐릭터와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달까?(웃음) 감정 이입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 같다.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나무, 풀, 꽃 등 자연물은 정면이 없지 않은가. 자연을 관찰할 때 그것이 나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넋 놓고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이 몰래 어떤 장면을 지켜보는데, 눈이 마주치면 부끄럽지 않은가. 캐릭터들이 정면이 아닌 다른 시선을 바라보는 것은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나도 모르게 장치로 사용하는 듯하다.
이번 전시 <찰랑>에 대해 소개해달라. 에브리데이몬데이에서 2년 만에 선보이는 개인전이다. 전시를 준비할 때, 그림 그릴 당시의 감정을 실감나게 담는 것이 나의 미션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한 부분을 강조하려 했다. 바로 이전 전시가 일본에서 있은 그룹전이었는데, 감정의 질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지점에서 ‘어떤 감정은 물과 같다’는 결론에 도달해서 물 표현에 대해 좀 더 집중된 그림이 많다.
감정의 어떤 면이 물과 같다고 느껴졌나? 감정이라는 것이 영향을 주고받기가 너무 쉽다. 마치 물 안에 있을 때 잘 섞이는 것처럼 상대방의 감정이 맞닿아 있지 않아도 전달되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너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마음으로 작업했다. 지금 아내와의 관계에서 느끼는, 현시점에서 내가 가장 재미있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바위되기>, <고독의 질감> 등 내면의 감정을 표현할 때 어떤 부분을 강조하려 하나? 작품 속에 표현하는, 내가 느낀 감정은 사적이고, 아내와 겪은 사건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한 깨달음이다. 그래서 최대한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고 감정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게 열어두려 한다.
이번에 처음으로 영상 작업을 선보인다. 사실 내가 그린 그림들은 모두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영상으로 인해 설명이 너무 많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 영상의 필요성을 잘 느끼진 못했는데, 이번에는 한번 해보자 싶었다. 영상 속 장면 중 이미 그림이 된 작업이 있다. 프랑스에서 전시한 <너의 기분 속을 헤엄치다>라는 작품이다. 왜 그런 장면이 나왔는지 설명하는 식으로 영상을 만들었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작품은? 지금 작업에서 인물 이외에 자연물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는데, 더 많은 자연물을 그려보고 싶다. 나무, 풀, 물, 돌 등 더 많은 비유를 찾아내고 싶다. 영상은 언제든 할 수 있고 부수적인 작업이라 생각한다. 어떤 형태로 작업된다기보다는 주제적인 측면에서 그려보고 싶던 것들을 더 끌어들여보고 싶다.
최근 준비 중인 작업이 있나? 키아프 서울에 출품할 그림들을 그릴 것이다. 그리고 아내(동양화가 화란 작가)와 함께 독일 라이프치히의 아티스트 레지던시에 갈 예정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