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 속의 기억

유리 속의 기억

유리 속의 기억

투명한 유리에 담긴 재와 그을음으로 사물의 사라짐과 변화를 기록하는 박지민 작가.

높은 온도의 유리판 사이에 일상 사물을 넣어 태우는과정에서 생기는 재와 그을음을 볼 수 있는 <바니타스 시리즈 Vanitas Series>.

유리 물성 자체를 탐구하며 독특한 텍스처와 형태를 선보이는 박지민 작가.

박지민 작가는 유리 공예 작업에서 재와 그을음을 활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어낸다. 수집한 사물들을 700~1200℃의 유리 사이에 넣어 그을음으로 변형시키는 과정을 거친다. 이 작업은 단순히 재료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고온에 의해 사물이 타고 남은 흔적을 유리에 고정시킨다. 투명한 유리판 사이에 담긴 사물들은 타면서 재로 변하고, 그 흔적은 유리 안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 흥미롭다. “저만의 방식으로 앨범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어릴 적에 가족 여행을 다녀오면 엄마가 앨범에 단풍잎을 넣고, 날짜와 추억을 기록하시던 모습이 기억나요. 투명한 유리판 사이에 코팅하듯 담긴 사물은 높은 온도에 재가 되어요. 재는 바람에 흩날려 사라지기 마련인데, 유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 재미있기도 해요.” 길 위의 낙엽이나 신문지, 영수증 같은 일상사물은 물론 재개발이나 벌목 장소에서 수집한 버려진 사물을 작업에 활용하며,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을 담아내는 데 주목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레지던시 결과보고전에 선보인 <별 01-65>. 폐유리를 선별해 다양한 색감과 텍스처를 구현했다.

© 곽동기

이 과정에서 사용된 사물은 재료와 온도에 따라 형태와 색이 변하며, 원래 모습을 잃고 추상화되는 점이 작가에게 흥미롭게 다가온다. 유리 작업은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던 학부 시절, 투명한 재료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었다. 작가는 유리의 물성에 대한 탐구를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을 진행했고, 이를 통해 평면 작업부터 입체적인 오브제, 대규모 설치 작업까지 폭넓은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인공적인 색을 사용하지 않고 우연성에 기반한 작업을 통해 매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유리라는 재료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특히 올해 초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한 작업은 유리 물성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탐구를 보여준다. “다른 재료는 파손이 되었을 때 똑같이 돌이킬 수 없지만, 유리는 물성상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아도 뜨겁게 녹이면 다시 붙어요. 버려진 유리들을 보며 ‘폐유리의 기준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재처럼 유리를 작게 분쇄해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보기 시작했어요.

뉴욕 어반 글라스 Urban Glass에서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연 개인전 에서 선보인 유리 달항아리.

버려진 유리에 대한 고민을 담은 <폐유리 관찰기>.

작가는 폐유리를 재처럼 분쇄해 다시 덩어리로 만들고, 이를 통해 유리의 순환 과정을 표현한다. 유리가 깨지고 가루가 된 상태에서 다시 합쳐져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모습을 우주의 별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과정에 비유하며, 이 순환의 개념을 작품에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실용적인 기능을 담은 공예 작업을 처음으로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뉴욕과 서울에서 전시하고 있다. 뉴욕에서는 전통적인 청호백자를 재해석한 유리 달항아리 작품을 선보인다. 전통 항아리 표면에 그려진 소나무, 매화, 포도를 유리에 넣고, 이때 타면서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만든다.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같은 작업을 하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새로운 발견을 하게 돼요. 겉보기엔 비슷해 보일지라도 매번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내며 유리에 대해 알아가고 있어요.” 작가는 유리 작업을 통해 실용성과 공예적 아름다움을 담아내며, 유리 재료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CREDIT

에디터

포토그래퍼

이현실

TAGS
달항아리의 재해석 1

달항아리의 재해석 1

달항아리의 재해석 1

조선시대의 달항아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는 세라믹 아티스트 3인과의 인터뷰.

제인 양 데엔 Jane Yang-D’Haene

2023년 갤러리 더 퓨처 퍼펙트 The Future Perfect LA에서 선보인 개인전 <기억 Remembrance>.

간단하게 자기 소개 부탁한다. 브루클린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한국에서 태어나 1984년 뉴욕으로 이주했다. 주로 석기와 유약을 사용하여 전통 한국 도자기에 영감을 받은 수공예품을 제작하고 있다.

자신의 스타일을 키워드로 정의하자면? 간결하고 우아한, 그러나 실험적인. 상반된 요소들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 노력한다.

2022년 더 퓨처 퍼펙트 뉴욕에서 선보인 단체전. 첸 첸&카이 윌리엄스 Chen Chen&Kai Williams의 거울에 비쳐 더욱 신비로운 모습이다. © Sean Davidson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도자기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전환의 시기를 겪고 있을 때 한 친구가 도자기 수업을 추천해줬다. 점토는 매우 촉각적이고 까다롭지만 그만큼 재료에 대해 탐구하며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 또한 지구에서 온 점토 그 자체가 주는 안정감과 차분함이 있다.

한국의 달항아리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지금은 미국에 있지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릴 적 집에는 달항아리가 있었다. 어머니의 항아리를 깨뜨린 경험이 강렬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기도 하다.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었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깊은 내면적 인상이 남아 있다. 그 형태를 가지고 실험함으로써 나의 유산과 문화를 작업에 녹여내고 있다. 또한 달항아리는 가장 매력적이고 차분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도자기 역사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손으로 그려넣은 듯 투박하면서도 섬세한 질감이 돋보인다.

전통적인 형태와 무엇이 다른가? 달항아리는 매우 간단해 보이는 형태이지만 실제로는 도전적이며 복잡하다. 그래서 더욱 작업적으로 끌린다. 다시 말해 상반된 요소들에 대한 아이디어를 보여주려 한다.

매끄러운 표면보다 독특한 질감 표현도 인상적이다. 전통적인 달항아리의 매끄러운 표면은 깊은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질감을 추가함으로써 현대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유약이든 점토의 질감이든 각 작품에 나의 감정과 이야기의 층을 더하고 있다. 그날의 느낌이나 순간, 인상 등이 질감과 재료를 통해 각 작품에 담기게 된다.

다양한 형태와 질감을 접목해 독특한 세라믹 작업을 선보이는 제인 양 데엔 작가.

좋아하는 예술가는? 다른 예술가들의 작업을 반영하며 시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여성 예술가의 작업을 매우 존경한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작품을 좋아하며, 오늘 아침에는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보았다. 또한 전통 한국 미술과 한국 민화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최근 준비 중인 전시는? 9월에는 뉴욕의 아모리 쇼, 12월에는 디자인 마이애미에서 더 퓨처 퍼펙트 The Future Perfect와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앞으로 도전해보고 싶은 작업은? 회화. 그릇에 사용하던 유약을 2차원 표면으로 확장해 그림을 그리는 방향으로 이동해왔다. 현재 더 퓨처 퍼펙트를 위해 작업 중인 조명과 같은 설치 작업에도 더 많은 도전과 시도를 하고 싶다.

INSTAGRAM @janeyangdhaene

CREDIT

에디터

TAGS
HOMO FABER 2024

HOMO FABER 2024

HOMO FABER 2024

도구의 사용이 인간의 본질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인류를 호모 파베르라 부른다.

창조적 사고와 손끝에서 탄생하는 예술의 가치를 재조명하는 공예 비엔날레 호모 파베르 HOMO FABER 2024에 다녀왔다.

호모 파베르가 열린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의 폰다지오네 조르지오 치니의 전경.

전 세계 공예인들의 축제 호모 파베르가 올해로 3회를 맞이했다.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리는 비엔날레로 스위스 제네바에 기반을 둔 미켈란젤로 재단 Michelangelo Foundation for Creativity and Craftsmanship이 주최하며, 70여 개국에서 400명 넘는 작가가 참여해 약 800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이러한 방대한 규모는 짧은 연혁에도 불구하고 호모 파베르가 세계 최대 공예 비엔날레로 자리 잡았음을 암시한다. 전시 장소 역시 특별하다. 베니스의 산 조르지오 마지오레 San Giorgio Maggiore 섬에 위치한 폰다지오네 조르지오 치니 Fondazione Giorgio Cini 재단에서 열리는데, 이곳은 과거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던 자리로 베니스를 대표하는 문화적 명소다. 호모 파베르는 베니스 전체가 비엔날레의 취지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본섬뿐 아니라 무라노 Murano, 부라노 Burano 섬 등에 위치한 70여 개 공방이 참여한다. 부라노의 레이스 제작자, 무라노의 유리 예술가, 전통 연극 의상과 마스크를 제작하는 장인 등 베네치아의 전통을 지키는 공방들은 비엔날레 기간에 사전 예약 없이 방문하거나 워크숍에 참여할 수 있다. 평소 외부 방문을 꺼리던 오래된 공방들도 이 기간에는 문을 활짝 열고 공예 애호가들을 맞이한다.

공동 아트 디렉터를 맡은 니콜로 로스마리니와 루카 구아다니노.

영화감독으로 잘 알려진 루카 구아다니노 Luca Guadagnino와 젊은 건축가 니콜로 로스마리니 Nicolo Rosmarini가 공동 아트디렉터를 맡은 것도 화제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Call Me by Your Name>, <아이엠 러브 I am Love>, <어 비거 스플래시 A bigger Splash> 등의 작품을 통해 이탈리아 미학을 탁월하게 연출해온 루카는 건축과 인테리어,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호모 파베르 워크숍에 참여한 베니스의 아트 프린팅 공방.

1888년부터 베네치아 전통 기법으로 모자이크를 만들어온 오르소니 베네치아 Orsoni Venezia 1888의 컬러 라이브러리. 가우디가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만들 때 사용했다.

THE JOURNEY OF LIFE

호모 파베르 2024 포스터. 자료제공: 미켈란젤로 재단

이번 비엔날레 주제인 ‘인생의 여정 The Journey of Life’은 미켈란젤로 재단 부회장인 한넬리 루퍼트 Hanneli Rupert가 기획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공예품을 단순히 지역적 경계로 구분하지 않기 위함이다. 지난 2회의 주제 ‘Living Treasure Europe and Japan’이 유럽과 일본에 한정된 작품들을 소개한 반면, 이번에는 아시아, 남미, 중동, 아프리카를 포함한 전 세계의 작품들을 포괄했다. 이를 위해 재단은 뉴욕, 파리, 런던 등 주요 도시와 더불어 남아프리카공화국, 방글라데시, 멜버른 등 다양한 지역의 공예 전문가들을 초청해 자문팀을 구성했다. 한국에서는 청주 비엔날레 감독 강재영 큐레이터가 참여해, 한국 및 아시아 지역의 공예 작가들을 선정하는 데 기여했다.

‘인생의 여정’이라는 주제는 두 아트디렉터에게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폭넓은 해석의 여지도 주었다. 루카와 니콜로는 폰다지오네 치니 재단의 공간적 특성을 살려 전시장을 무대처럼 연출했다. 배를 타고 선착장에 내리는 순간부터 관람객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공간과 작품에 에워싸인 느낌을 받으며 전시에 몰입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두 예술가는 핑크, 아프리콧, 파우더 블루 등 파스텔 컬러를 메인으로 사용해 이탈리아의 ‘달콤한 인생 La Dolce Vita’을 보여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시는 인생을 출생부터 사후 세계까지 총 10개 테마로 풀어냈다. 탄생 Birth, 유년기 Childhood, 축하 Celebration, 유산 Inheritance, 사랑 Love, 여행 Journeys, 자연 Nature, 꿈 Dreams, 다이얼로그 Dialogues, 사후 세계 Afterlife로 이어지는 전시장은 기능적인 일상용품부터 극도로 장식적인 오브제까지 총망라해 공예가 인간의 일생에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1. BIRTH

인생 여정의 첫 번째 테마는 ‘탄생’이다. 아름다운 사이프러스 회랑을 둘러싼 60개의 자수 패널은 이탈리아 전통 게임인 ‘거위 게임 Goose Game’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시작된 이 주사위 게임은 현대 보드게임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호모 파베르가 이 게임을 탄생과 연결시킨 이유는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행운과 위험이 교차하는 게임의 구조가 예측할 수 없는 인생과 운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개발한 나이젤 피크 Nigel Peake는 베니스의 다리, 운하, 건물, 좁은 골목에서 영감을 받아 거위 게임의 디자인 컨셉트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20명의 자수 장인에게 전달했다. 멕시코, 르완다, 인도 등 다양한 국가의 전통 기법과 비즈, 시퀸, 금세공, 루네빌 자수 등을 통해 동일한 주제를 다채롭게 표현했다.

2. CHILDHOOD

이탈리아의 세라믹 아티스트 피에르루이지 폼페이 Pierluigi Pompei와 미국의 음향 전문가 아담 폭스웰 Adam Foxwell이 협업한 컬러풀한 세라믹 스피커에서 음악이 울려퍼지는 복도를 지나면, ‘유년기’를 테마로 한 공간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수많은 장난감과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어 눈길을 끈다. 네드 칸트렐 Ned Cantrell의 유리로 만든 고래 인형, 한나 레몬 Hannah Lemon의 미니어처 하우스, 에릭 랜스다운 Eric Lansdown의 인형의 집 같은 작품들은 우리가 어릴 때 어떻게 놀고, 배우고, 실험했는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며 공예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준다. 단순히 보기만 하는 전시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조각가 알렉산더 베르케르트 Alexander Berchert의 목제 핀볼 머신 같은, 관람객이 직접 작동할 수 있는 몇몇 작품으로 인해 더욱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3. CELEBRATION

 

우리 삶 속 ‘축하’의 자리에는 언제나 수공예품이 함께해왔다. 생일이나 결혼식 같은 특별한 기념일은 물론 일상적 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고 싶을 때 우리는 아끼는 공예품을 꺼내 사용한다. 12m에 달하는 종이 사이프러스 나무가 양 옆에 서 있는 문을 지나면 핑크색 실크로 장식된 벽과 대형 테이블로 연회장처럼 연출된 전시장이 펼쳐진다. 테이블 가장자리에는 이탈리아 하이 주얼리 브랜드 부첼라티 Buccellati의 화려한 실버스미스 센터피스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위에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다양한 재료와 기술로 만든 테이블웨어, 커틀러리, 글라스, 촛대, 센터피스와 함께 종이와 유리로 만든 과일이나 음식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식탁 위 수많은 공예품은 우리가 일상에서 축하와 접대를 어떻게 즐기는지 보여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다양한 식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4. INHERITANCE

‘유산’은 호모 파베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가치인지도 모른다. AI 시대로 넘어가는 오늘날, 손으로 물건을 만드는 기술은 점점 사라져가고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적의 장인들이 전수자를 찾지 못해 그 기술이 소실되고 있는 현실이다. 조르지오 치니 재단의 복원 작업에서 영감을 받은 이 테마는 전 세계적으로 기술 전승의 위기를 주제로 삼으며 전해지는 지식과 기술의 가치를 조명한다. 전시장 천장에는 이탈리아, 우즈베키스탄, 남아프리카, 일본 등에서 대대로 이어온 장인 가족 열팀의 영상을 상영해 그들이 비누, 인형, 신발, 도자기, 석재를 제작하는 기술을 어떻게 보전하고 전승하는지 보여준다. 특히 우리나라의 중요무형문화재인 박창영 장인과 그의 아들 박형박 작가가 5대째 이어서 만들고 있는 갓이 전시되어 많은 이들의 눈길을 끌었다.

5. LOVE (COURTSHIP, UNION)

다섯 번째 테마 ‘사랑’은 두 파트로 나뉘어 전시된다. 첫 번째는 ‘구애 Courtship’로, 꽃을 주제로 한 전 세계 장인들의 작업을 모아 ‘유혹의 정원’을 만들었다. 보편적인 매체에서 창의성은 더욱 빛나는 법. 오로지 종이로만 제작한 마리안 구엘리 스튜디오 Studio Marianne Guely의 이터널 부케 Eternal Bouquet, 왁스로 만든 모네 오렌 Mone Oren의 스틸 라이프 Still Life 등 다양한 소재와 궁극의 기술로 영원한 꽃을 만들어냈다. 정원을 지나면 두 번째 테마 ‘연합 Union’이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공예가들이 문화나 언어에 상관없이 어떻게 사랑에서 영감을 받는지 볼 수 있다. 비저네어 Visionnaire와 스튜디오 페페 Studio Pepe가 협업한 꼬임 의자는 사랑의 또 다른 의미인 결합을, 노르웨이의 조각가 학콘 안톤 파게라스 Hakon Anton Fageras의 대리석 베개는 인생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다운 순간이 베개 위에서 이루어진다는 위트를 담았다. 공간을 더욱 완벽하게 해준 천장 조명은 이탈리아 워치 메이킹의 자존심 파네라이와 더백스튜디오 Thebackstudio의 협업으로 만들어졌다.

6. JOURNEYS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인 ‘여행’을 테마로 한 전시장은 ‘Journey Tea Room’과 결합된 체험형 공간이다. 자연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티룸에서는 이탈리아의 듀오 디자이너 브롤리아토 트라베르소 Brogliato Traverso가 카펠리니를 위해 만든 의자에서 휴식을 취하며 베니스 미쉐린 레스토랑 로칼 Local의 고대 무역로에서 영감을 받은 요리를 맛볼 수 있다. 전시장에서는 손으로 그린 지도, 나침반, 천문 시계, 배 모형 등 여행과 관련된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되며, 18세기 포켓 사이즈 지구본을 재현한 로레인 루트 Loraine Rutt의 페블 글로브 Pebble Globe와 레오나르도 프리고 Leonardo Frigo의 핸드페인팅 글로브가 눈길을 끈다. 인공위성으로 실시간 지구를 볼 수 있는 시대에,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지구본은 특별한 감동을 준다.

7. NATURE

 

‘자연’은 예술가와 공예가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다. 네이쳐 Nature 전시장은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가득 차 있어 마치 숲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스틸과 와이어로 동물의 움직임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이자 동물 애호가로 유명한 켄드라 헤이스트 Kendra Haste의 작품이 맞이하며, 자연 요소에서 영감을 받은 다양한 공예품이 전시된다. 밀싹 뿌리, 달걀 껍데기 같은 예상치 못한 소재로 만든 오브제들이 자갈, 나무줄기, 덩굴, 꽃 등 유기적인 형태와 함께 어우러져 독특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밀라노에서 주목받는 신진 디자이너 맥시밀리언 마르체사니 Maximilian Marchesani는 기후 변화로 변이된 나뭇가지와 앵무새 깃털에 LED 조명을 결합해 만든 천장 램프를 선보였다. 이와 더불어 재활용과 업사이클링을 통해 지속 가능한 공예를 시도하는 작품도 전시되어 자연과 인간의 공생을 강조한다.

8. DREAMS

호모 파베르의 관전 포인트 중 하나는 두 아트디렉터가 조르지오 치니 재단의 건축물을 독창적으로 변모시킨 점이다. 셀러브레이션 Celebration 전시장이 식당을 거대한 연회장으로 변신시켰다면, 드림 Dreams 전시장은 수영장을 활용해 가장 드라마틱한 공간을 연출했다. 이 전시에서는 전 세계의 장인 30명이 만든 다양한 가면이 어두운 실내를 둘러싸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가면들은 신비로우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내며 관람객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핀란드, 우크라이나, 아이슬란드, 콜롬비아, 불가리아 등 다양한 국가의 장인들이 제작한 가면은 의식, 상징, 영성을 표현하는 예술적 작품으로서, 인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수영장 위로는 알라이아의 디렉터 피터 뮐리에 Pieter Mulier가 제작한 니트 드레스가 수면에 반사되며 기술과 예술의 결합을 통해 구현된 여성성을 보여준다.

9. DIALOGUES

 

다이얼로그 Dialogue 전시장은 관람객과 장인들의 인터랙션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호모 파베르가 지원하는 펠로십 프로그램에 참여한 장인과 디자이너(제자), 다양한 세대의 공예가들이 협업한 결과물이 전시된다. 공예가는 물론 유명 브랜드의 시연과 워크숍이 벌어지기도 한다. 피아제 Piaget와 IWC 같은 유명 메종 장인들이 시계와 주얼리 제작 과정을 라이브로 보여주고, 산토니 Santoni는 이탈리아의 수제화 제작 과정을, 1823년 빈에서 시작된 유리 공예 브랜드 J.&L. Lobmeyer는 200년 넘게 이어진 오스트리아 전통 글라스 메이킹을 시연한다.

10. AFTERLIFE

 

인생의 마지막 여정은 죽음이 아니라 ‘사후 세계’다. 유골함, 양초, 관 등 장례와 관련된 공예품이 전시되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죽음을 둘러싼 의식과 전통 속에서 장인정신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보여준다.

HOMO FABER 2024에 참여한 한국 작가들
한국 작가는 24명이 이번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그중 현장에서 주목받은 작가와 작품을 소개한다.

조희화 <Game of the Goose XXXVII, XXXVIII, XXXIX>영국에서 활동하며 우리나라 전통 궁중 자수를 널리 알리고 있다. 가는 명주실과 금세공으로 섬세하고 치밀한 작업을 선보인다. 호모 파베르 디자인 컨셉트에 충실하면서도 한국 전통 자수 기법과 색동과 오방색을 사용해 한국의 미를 살렸다.

윤여동 <Oval Plate Set> 금속의 고요함에서 미묘한 떨림과 움직임을 구현한다. 한국 소반에서 영감을 얻은 알루미늄 소재의 오발 플레이트는 두드린 자국이 있는 질감이 특징이다.  

양승진 <Blowing Lounge 1> 예상치 못한 형태에 대한 관심으로 풍선을 기본 재료로 삼아 단단한 공예품을 만든다. 에폭시 레진으로 광택을 더하고 형태가 견고한 노란 블로잉 체어로 경쾌한 유년기를 표현했다. 

박창영&박형박 <Men’s Black Gat/Men’s White Gat> 130여 년 동안 이어져온 갓 만들기 장인이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받았다. 대나무와 실크로 만든 일반적인 스타일을 선보였는데 이 중 백립은 왕의 서거를 기리기 위해 착용하는 것이다. 

고혜정<The Wishes>  2023 청주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받았다. 3000개 이상의 민들레 홀씨 모양을 단위로 산등성이를 연상시키는 비대칭 항아리를 만들었다. 황동으로 제작하고 은도금을 했다. 

박영호 <Memory Drop>흐르는 유리에 잉크를 떨어트려 색을 입히고 유리 세공 기술로 섬세하게 형태를 만든다.

정소윤 <Someone is Praying for You 2020_3> 손과 재봉틀을 활용해 만든 직물로 자연의 유기적인 형태를 제작한다. 다양한 농도로 염색된 투명한 실을 사용해 산등성이를 연출했는데, 누군가를 기리기 위한 작품이라 Afterlife 전시장에 잘 어울린다. 

황삼용 <The Pebble Series> 데미안 허스트가 구입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자개를 1mm 이하로 섬세하게 자르고 물체의 표면에 상감하여 독특한 문양을 만들어내는 것이 특기다. 최고의 재료로 우리나라 서해안의 전복껍데기를 꼽는다. 

이종민 <Untitled> 전통 기술로 백자를 만든 뒤 치과용 도구를 사용해 섬세한 조각을 한다. 세밀한 작업 방식은 작품의 표면에 빛과 그림자를 만들어내 스스로 빛나게 한다.

CREDIT

에디터

Writer

장수연

TAG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