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등장한 가장 기발한 디자인의 과일 스퀴저, ‘주시 살리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이탈리아 동부의 작은 섬 카프라이아(Caprair)에서 괴짜 디자이너이자 스타 디자이너라 불리는 한 남자가 고요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다. 투명한 바다를 배경으로 한 레스토랑에 앉아 해물 요리를 즐기고 있는 동안, 옆에서 누군가 음식에 상큼한 미감을 더하기 위해 레몬즙을 짜는 중. 그리고 그 순간! 요란하게 떠오른 디자인 영감을 스케치하기 위해 디자이너는 토마토 케첩이 묻어 있는 냅킨을 테이블 위에 펼친다. 이 위에 그려진 스케치는 훗날 가장 흥미로운 과일 스퀴저의 디자인이 된다.”
이 상황은 바로 알레시의 설립자 알베르토 알레시가 2000년 회고했던 필립 스탁 디자인의 ‘주시 살리프(Juicy Salit) 이야기를 빌려 정리해본 시나리오다.
컨템퍼러리한 디자인 제품을 생산하는 알레시가 1990년 소개한 주시 살리프는 그들의 가장 유명한 디자인 프로덕트로 꼽히며 필립 스탁의 디자인 가운데서도 의심할 여지없이 가장 잘 알려진 제품이다. 등장과 동시에 산업 디자인의 대표적인 아이콘으로 떠오른 주시 살리프는 뉴욕 모마(MoMA) 소장품에 당당히 등극했고 지난 2000년에는 출시 10주년을 기념해 금도금 소재의 리미티드 에디션이 소개되기도 했다. 폭 14 cm, 높이 29cm의 광택이 나는 알루미늄 구조물은 오징어 요리를 먹고 레몬즙을 짜던 디자이너의 순간적인 영감과 오랜 고민이 만나 이뤄낸 재치있는 디자인이다. 이탈리아 디자인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에게 수년간 필립 스탁을 만나볼 것을 권유받았던 알베르토 알레시. 당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디자인계의 총아 필립 스탁은 혁신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 알레시를 위한 적임자였다. 1987년 둘의 만남 이후로 이렇다 할 영감을 받지 못했던 필립 스탁이 그날 휴가지에서 보내온 메시지는 이제, 알레시 그리고 필립 스탁 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상징적인 디자인이 됐다.
본능적인 상상력과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에 충실한 ‘주시 살리프’는 아주 간단한 제조 방식과 구조만으로 제 기능을 완수한다. 디자인에만 치중한 비실용적 제품이란 비판도 있지만 나름의 계산으로 고안된 실용적인 홈과 단단한 알루미늄 구조물은 시트러스 과일의 충분한 과즙을 짜내기에 부족함이 없고 기계가 아닌 도구로서의 원시적인 사용 방법도 높이 평가하고 싶은 부분이다. 편리함만을 고려하는 사용자에게는 비추지만 디자인 대비 실용성에 점수를 주는 디자인 마니아에게라면 서슴없이 강추할 만큼. 물론 직접 사용하고 있는 소비자로서의 개인적인 의견이다. 또 확실한 자신만의 조형적인 아이덴티티를 갖고 있다는 면에서도 이 제품은 완벽히 필립 스탁스럽다. 그리고 필립 스탁은 말했다. “나의 과즙기는 레몬만을 짜는 도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그러면 그렇지. 이 이야깃거리 많은 조그만 구조물은 과즙기 이상의 도구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필립 스탁
(Philippe Starck 1949년 ~)
1949년 파리에서 태어난 필립 스탁은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디자이너 중 하나이자 가장 유명한 디자이너이다. 독학으로 디자인을 공부한 그는 스무 살에 피에르 가르뎅의 아트 디렉터로 활동을 시작했고 1974년 뉴욕 활동 이후 1976년 파리로 돌아와 1980년 독립전문회사인 ‘스탁 프로덕트’를 설립해 자신만의 색깔 있는 작업을 이어갔다. 특히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 재임 시 엘리제 궁의 실내 장식을 맡아 더 유명해졌고 이후 가구 디자인, 인테리어, 건축, 제품 디자인 등 폭넓은 활동으로 자신만의 디자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대표적인 인테리어 작업으로는 뉴욕의 파라마운트 호텔(1990년), 홍콩의 페닌슐라 호텔 레스토랑 펠릭스(1994년), 파리의 레스토랑 콩(2003년)을 비롯해 다양한 부티크 호텔 디자인이 있고 가구 디자인으로는 발레리 이탈리아(현재는 세루티 발레리)의 리차드 II(1984년), 카르텔의 에로스(2001년), 루이고스트(2002년) 마드모아젤(2003년), 드리아데 라고(2005년), 비트라의 바오밥(2007년) 등이 있으며 바카라, 플로스, 알레시, 피암, 에메코, 알리아스 등 전 세계 수십 개의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디자인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