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새로운 디자인은 없는 걸까? 수세기를 걸쳐 인정 받은 디자인 클래식들은 이제 시간 이동을 하는 듯하다. 첨단의 시대에 그들의 고유한 디자인은 고스란히 살아남은 채 컬러와 재질 그리고 약간의 미감만이 현대적으로 변모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절묘한 ‘데모르마시옹(변형)’ 현상을 주목해보자.
실루엣이 주는 아름다운 미감을 예전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까? 클래식한 한국의 전통가구를 모던한 실루엣으로 재탄생시킨 테이블, 투박한 뻐꾸기 시계를 블랙 평면으로 대체한 벽시계, 프레임만 앙상하게 남은 오브제 같은 의자 그리고 블랙 페인트 통에 빠뜨려버린 일곱 난쟁이까지. 이 시대의 트렌디한 제품들은 클래식한 디자인의 형태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다.
마치 공장에서 쓰이는 철과 나무 위에 덧칠해진 크로매틱 페인트 컬러를 연상해보자. 약간은 탁한 듯 톤 다운된 그레이와 와인 컬러들. 이 트렌디한 컬러를 배경으로 놓인 오브제들을 보라. 이 시대 재활용이 가능해진 플라스틱 소재의 물조리개, 레고 블록처럼 조립할 수 있는 펜던트, 스틸 다리를 덧붙인 커다란 트레이 테이블, 플라스틱 캡을 덮어 씌운 에디슨 전구, 컬러풀해진 그물 장바구니. 예전의 디자인은 그대로 살린 채 심미적으로 기능적으로 무언가를 덧붙이고 있다.
그립감이 좋은 고무 재질로 마감된 후추 그라인더, 인체공학적으로 각도를 바꾼 빵 칼, 모던하게 다듬어진 티포트, 부엌 어딘가에서 본 듯한 이 익숙한 제품들은 분명 현대의 디자이너들이 고심한 끝에 내놓은 신제품들이다. 이들의 매력적인 변화에 박수를!
기능적으로만 느껴지는 메탈의 이미지가 달라지고 있다. 강인하고 딱딱하게만 느껴졌던 메탈 소재의 제품들은 오히려 하나의 오브제를 보는 듯 장식성을 강조하고 있다. 파도 모양으로 구부러진 촛대, 유연한 다리를 가진 트레이, 올록볼록한 수납함을 가진 벽걸이형 펜슬 케이스, 쓰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답지 않은가!
필립 스탁과 스테파노 지오바노니가 아무리 위트 있는 주방 용품을 내놓아도 이 클래식한 디자인의 기능을 따라오긴 힘들 것이다. 오히려 이들을 약간 현대적으로 변형시킨 엔조 마리의 주방 기구들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기능’을 선사한다. 크기를 확대한 병따개, 벽에 걸리는 각도를 고려해 살짝 휘어 놓은 냄비, 손잡이 프레임으로 미감을 강조한 식칼, 형태를 단순화시킨 프라이팬을 주목하라.